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작은감자 2009-11-18 , 조회 (422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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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4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구주이심을 증명함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구주이심을 증명함

누가복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구주이심을 증명함

요한복음: 생명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구주이심을 증명함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4복음서의 아래 장,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8개 절)

마가복음: 14장 3절~9절 (7개 절)

누가복음: 7장 36절~50절 (15개 절)

요한복음: 12장 1절~8절 (8개 절)

 

다른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는데 7~8개 절을 할애한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두배인 15개 절을 사용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이 우리의 죄들에 대한 용서와 용서함을 받은 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므로 죄들에 대한 용서를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이 이 사건을 가장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관한 4복음서의 기록이 4복음서의 주제와 어떻게 부합되는지 비교하여 보면서 주님의 풍성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게 된 연유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라고만 하고 거기에 왜 계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식사하고자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였다라고 말씀함으로서 주님께서 그 집에 계시게 된 연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는 자는 문둥병자, 즉 죄인입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누구의 집에 계셨는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으며 이곳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자, 죄인, 혹은 바리새인이라는 소극적 단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생명 안에서는 이곳이 누구의 집이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단지 베다니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곳입니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을 한 여인이라고만 말하지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라고 말함으로서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이나 죄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리아라고 그 이름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감추어 주시지만 생명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또 밝히 드러내십니다.

 

향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하고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함으로서 이 향유가 매우 값지고 순수한 나드 향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만 말할 뿐 값지다거나 순수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죽을 죄인에게 아무리 귀하고 값진 것이 자기의 손에 있다 한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을 앞둔 죄인에게는 값진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일 리트라라고 말함으로서 그 품질뿐만 아니라 양까지도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일 리트라는 현대의 측량 단위로 약 340그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죽을 죄인에게 있어서 향유가 제아무리 값지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생명의 관점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 쏟아붓는 향유는 품질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 양까지도 주님에 의해 정확히 계측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유를 어디에 부었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과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구주이신 하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뒤에 다가가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나서 그 발에 다정하게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머리에 몇방울의 향유를 부은 다음 나머지 향유로 주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복음서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누가 분개하였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분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몇몇 사람이 분개하며 서로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분의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마태복음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분개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에 누가복음에서는 자칭 의롭다 하는 죄인인 바리새인의 생각을,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을 배반함으로 생명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왕국 안에 있는 그분의 제자들의 시각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죄인인 사람과 생명의 원수인 사람의 시각을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언제인가

연대가 다함이 없는 영원하신 왕-구주에게는 때가 의미 없으며 곧 죽을 죄인에게도 때가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는 때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상에 않아 계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6일전에 주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6천년 전 사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우주의 베다니 마을인 이곳 죄인들의 땅에 들어오셔 죽은 사람을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약 경륜과 2천년 전 베다니 마을인 이 땅에 노예로 오셔서 죄인의 집 상에 앉으셨던 주님의 신약 경륜이 연상되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 봄으로서 4복음서의 저자가 각기 복음서의 주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명의 형제님들 안에서 역사하신 그 영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  김해교회 카페 김창규형제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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