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현재의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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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 2016-01-19 , 조회수 (4027) , 추천 (0) , 스크랩 (0)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현재의 소요에 관한 교통

<장로훈련 10권에서 발췌>

 

 

악한 자에 의해 선동됨

 

지난 이 년 동안 배역 안에서 발생한 것들을 철저하게 고려한 후에 나는 이 배역이 악한 자 마귀의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13:19). 왜냐하면 배역적인 자들에 의해 나타난 거의 모든 것이 논리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행한 몇 가지 방식들이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어그러진 사람들에 의해 수행됨

 

우리가 지금 주의 회복 안에서 마주치고 있는 것과 같은 배역은 악한 영적 근원에 의해 선동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수단으로 하여 수행되어진다. 바울은 사도행전 2030절에서 에 베소의 장로들을 권면하면서, 그들 자신 가운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거에 십구 세기에 걸쳐서 바울의 경고는 반 복하여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가운데 있는 현재의 배역이 바울의 경고의 또 다른 성취라고 말하고 싶다. 이 배역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많은 말들은 어그러진 것들로 여겨져야 한다.

 

 

가르침의 풍조들로 인해

 

이 배역 안에서 네 명의 인도자들에 의해, 특별히 지난 삼 년 동안에 나온 많은 가르침들 은 확실히 가르침의 풍조들이며(4:14), 그것들은 주 예수님이 홀로 직접 교회를 건축하심 (다른 이들을 통해서 교회를 건축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함), 지방 교회들 안의 절대 자치, 대표 권위가 없음, 영적인 아버지가 없음, 신정 정치 대신에 민주 정치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가르침의 풍조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인 신약(2:42)의 합당한 가르침의 빛을 통하여 도움 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하는 주의 회복 안의 몇몇 사랑스런 성도들을 손상시켰다.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험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배역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험이다. 논리적이며 합 리적으로 신약 가르침을 알고 있고 그분의 거룩하고 변하지 않는 말씀에 따라 주님께 신실한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소요 안에 있는 무분별한 말들을 관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역 은 확실히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험으로서, 그들이 옳다 인정함을 받기 위한 것이다(고 전 11:19).

 

 

회복을 정화함

 

배역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종의 체로 고르는 일을 한다. 체로 고르는 일은 그분의 단체적인 백성을 정화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에 의해 행사되어지는 일종의 정화로 여겨 질 수 있다. 더욱이 배역의 발생은 또한 의도, 동기, 목적, 목표, 등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신 실한 사람들을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 나도 어느 정도 정화를 받았다. 소요 기간 동안 사람들 이 나를 중상하고 비방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주님이 마태복음 511절에서, “나 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 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상황과 같았다. 나는 내가 잘못이 있었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주님과 함께 점검했다. 그렇게 점검함으로써 나는 정화되었다.

 

 

주의 회복 안에서 문제들을 처리하는 합당한 길

 

이제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서 문제들을 처리하는 합당한 길을 볼 필요가 있다.

 

 

주의 회복을 위해 참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짐

 

회복 안의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의 회복을 위하여 참되고 진실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어떤 문제에 관하여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이기주의, 자기 구상, 자존심, 자기를 고려함 등의 요소를 조금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떤 배경도 없이,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며, 순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위신을 갖고 있으며 스스 로를 높이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높이 평가해 주기를 기대한 다.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자존심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문제가 된다. 아마 우리는 항상 나는 어떻게 되며 나의 지위와 나의 장래와 나의 권익은 어떻게 되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 ?” . 만일 우리가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의 회복 안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순수해야 하며 주님에 의해 시험과 점검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주의 회복을 위해 순수하고 참되고 진실한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문제들을 처리할 자격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가 된다.

 

 

몸의 합당하고 편만한 교통을 통하여

 

주의 회복 안의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합당한 길은 몸의 합당하고 편만한 교통으로 말 미암는다. 우리는 어떤 작은 핵 혹은 작은 원의 교통이 아닌, 편만한 교통을 가져야 한다. 이 러한 교통은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몸의 합당하고 편만한 교통은 어떤 개인에 속하는 원도 없고, 어떤 당파심도 없으며, 감춰진 어떤 비 도 없다. 이런 많은 부정적인 항목들은 현재의 소요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실행되어 왔다. 그들은 개인에 속하는 작은 원들로 함께 모여서 계획하고, 모의하고, 공모했다. 그들은 심지어 여러 형제들에게 비 회의를 제의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인도자들과 함께한 합당하고 공개된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있었는데, 그것은 할례와 믿음의 문제를 고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의 때에 교회들 가운데 있 었던 큰 문제였지만, 형제들은 아무것도 비 리에 하지 않았으며 분당들을 형성하지 않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장로들 및 다른 사도들과 합당한 교통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2-21).

 

 

공모를 꾀하는 어떤 것도 피함

 

주의 회복 안의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공모를 꾀하는 어떤 것도 피해 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얼굴을 맞대하고 일들을 함으로써, 만사를 계속하여 빛 가운데 두어 야 한다. 우리는 일들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며 사람의 등 뒤에서 어떤 것을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사람의 등 뒤에서 혹은 적은 무리가 공모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마귀적이며 매우 악한 것이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5:8)는 아무것도 어둠 안에서 혹은 은 하게 하지 않고 만사를 빛 가운데 두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다. 왜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가? 우리는 또한 누구든 동정을 구하는 사람을 정죄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동정을 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는 또한 등 뒤에서 헐뜯는 것, 악한 말 을 하는 것, 사망을 퍼뜨리는 것 등을 버려야 한다. 등 뒤에서 헐뜯는 것은 잔인한 것이다. 악 한 말을 하는 것은 중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괴하기 위한 마귀의 주요한 일이다. 사망을 퍼뜨리는 것은 사망의 근원인 사탄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서, 영적 사망의 세균을 퍼뜨 려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이런 모든 마귀적인 악들을 버려야 한다.

 

 

유일한 목표를 붙잡음

 

만일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유일한 목 표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성도들의 함양을 위하고, 교회들의 유익을 위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고, 몸의 하나의 유지를 위하고, 주의 회복의 확 산을 위해야 한다. 이것들이 우리가 중심 노선이라 칭하는 중점들이다. 우리는 성도들의 함양 을 위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희생해야 하고, 교회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권익을 무시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모종의 개인적인 선호를 포기해야 하고, 몸의 하나를 지 키기 위해 각종의 개인적인 주장들을 떨쳐버려야 하고, 주의 회복의 확장을 위해 우리의 영역 들에 대해 잊어버려야 한다. 오직 이 길 안에서만 우리가 주의 회복의 유일한 목표를 고수할 수 있다.

 

 

성경에 따라

 

주의 회복 안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길은 또한 성경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서, 곡해 및 성경 의 문맥을 벗어난 해석이 없어야 하고, 사람의 생각을 조금도 섞지 말아야 하며, 어떤 전통의 요소도 없어야 하고, 오직 열려 있고 추구하는 영만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열려 있고 추구하는 영을 계속 유지한다면 문제들이 합당하게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곡해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한 말씀의 어떤 부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매우 객관 적이어야 한다. 문맥을 벗어나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인 인식이나 개인적인 느낌 안에서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각이 섞여 들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타고난 사상들, 우리의 타고난 지식, 우리의 타고 난 노력들을 거절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전통의 요소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한 말씀의 순수한 계시의 빛 아래 있을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계속하여 열려 있고 추구하 는 영 안에 있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성경에 따라 주의 회복에 관한 것들을 분변하고 판단할 수 있다.

 

 

과거에 감춰져 있었던 분열적인 요소들

 

우리 가운데 있는 현재의 어려움은 과거에 시작되었지만, 발효 작용 혹은 발효하는 과정은 1985년까지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발효하는 과정은 과거 몇 년에 걸쳐서 계속 되다. 가 올해(1989)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올해 8월에 현재의 어려움을 주도하고 있는 형제들이 말씀과 간증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주의 회복과 사역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나는 긴급 장로 훈련을 소집했다. 첫 번째 훈련은 19842월 두 번째는, 19859월 마지막은, 19862월에 있었다 장로 훈련( 1-8권 참조). 이 세 차례의 장로 훈련 중 두 번은 분열의 위험에 관한 말로 시작되었다.

 

 

주의 회복의 유일한 일 안에서 특별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

 

우리 가운데 있는 현재의 문제는 과거에 감춰져 있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렇게 감춰져 있었던 것들 중의 하나가 주의 회복의 유일한 일 안에서 특별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회복 안에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건축에 이르도록 지방 교회들의 건축을 위하는 명확 한 일이 있다. 이것이 유일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이 일 안에서 특별한 일을 하기를 원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회복을 떠나거나 교회 생활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회복 안에서 자신의 노력에 의해 자신의 특별한 일을 갖기를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분열적인 요소이다.

 

 

분리된 영역들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

 

또 다른 분열적인 요소는 분리된 영역들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의 성취를 위한 주님의 일과 움직임은 유일하게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유일한 일 안 에서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어떤 지역을 우리의 특별한 영역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열의 원인 또는 요소가 될 것이다. 심지어 분리된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도 그 뿌리가 뽑혀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한계 안에서 주님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 (고후 10:13-16),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것을 우리의 특별한 영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역에서의 우리의 지방적인 일은 주님의 우주적인 몸 을 위해야 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주님의 일 안에서 관할권과 같은 그러한 것을 볼 수 없다.

 

 

한 사람의 일을 다른 이들의 일과 연합시키지 않는 방식

 

과거에, 한 사람의 일을 다른 이들의 일과 연합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는 감춰진 요소가 있었다. 신약은 우리에게, 주로 유대인들의 땅에서의 주님을 위한 베드로의 일과, 주로 이방인들의 세계에서의 바울의 일이 모두 어떤 구별이나 분리가 없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위했 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였다. 베드로 의 일의 효과가 고린도에서 실현되었으며(고전 1:12), 바울은 참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의 사도들 및 장로들과 교통했다(15:2, 4, 21:17-20). 이러한 교통은 마치 우리 신체의 혈 액 순환처럼 신성한 생명의 순환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돕는다. 그것은 주의 회복을 위한 우리 일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한 움직임 안으로 연합시킨다. 만일 우리의 일에 이러한 교통이 없다면, 우리의 일은 분열의 또 다른 요소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의 일 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감춰진 기대

 

또한 주의 일 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감춰진 기대가 있었다. 우리는 이 야심의 두더지가 우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여러분이 야심을 품고 있으면서분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분량이 여러분의 야심을 중화시킬 때 문제가 없을 수도 있 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문제는 많은 형제들이 야심을 갖고 있지만 분량이 없다는 것이다. 야심이 있지만 분량이 그에 못 미치는 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만일 야심을 품고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분량이 있다면 그들의 분량이 그들의 야심에 속 한 추한 것들을 삼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야심만 있고 그들의 야심을 위한 분량이 없다면, 분량이 못 미치는 그들의 야망은 그들을 탈락자들로 만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갈망하고 여러분에게 그런 분량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만일 모든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받고 모든 교회들이 여러분의 말 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뛰어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자신에게 분량이 없는데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발생하는 때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나바는 주님에 의해 나중에 바울이 된 사울을 사역 안으로 인도하는 데 쓰임 받았다(9:26-27, 11:22-26). 더욱이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의 신언자들과 교사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었고, 그 영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일을 위해 따로 세우셨는데, 그때 바나바의 이름이 첫 번째 언급되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후 오래 되지 않아서 분량의 문제가 생겼다. 여행의 초기에는 바나바가 항상 먼저 언급되었는데(2, 7), 나중에 바울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기 시작 한다(9, 13, 16, 46, 50). 바울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었던 이유는 그 당시에 필요를 채우는 바울의 분량이 바나바의 분량보다 더 컸고 그가 결국 앞장서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기 때 문이다(14:12). 바울이 앞장서서 그들의 여행을 인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가진 분량이 더 컸기 때문이고 바나바에게는 바울이 가진 분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바울은 열 네 서 신서를 썼다. 누가 바울이 말한 것만큼 많은 말을, 바울처럼 깊게, 바울처럼 높게 말할 수 있 었겠는가? 신약의 모든 기자들 중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기자들이 이 용어나 경륜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가진 분량이 바울의 분량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여행으로부터 안디옥에 돌아온 후 할례에 관하여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안디옥 교회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위해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교통케 했다 (15:1-3). 할례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후에 그들은 또 다른 여행을 하기 원했다(36). 이때에 바나바는 그의 생질 마가라 하는 요한을 그 여행 에 데리고 가기 원했다(37, 4:10). 그러나 바울은 마가가 그들의 첫 번째 사역 여행에서 부정적으로 바나바와 바울에게서 떠났다는 이유로 그를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 다(13:13). 마가가 그들과 함께 가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갈망은 단순히 그 자신의 느낌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 갈라섰다(15:39). 그 시점으로부터, 비록 바 나바가 밖으로 나가서 교회들을 방문했겠지만, 사도행전의 신성한 기록에 관한 한 그의 사역 은 끝이 났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는 주로 두 가지 점일 것 같다. 첫째, 바나 바는 초기에 자기가 인도했는데 나중에 자기의 분량이 더 작음으로 인해 바울이 인도하기 시 작했으므로 내면에 어떤 달갑지 않은 마음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극복하기 쉬운 문제 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바나바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기뻐했다면 그것은 바나바에게 큰 긍휼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사도행전 15장의 기록에 따르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감에 있어서 합당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외견상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단지 그의 생질에 대한 자 신의 개인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마가로 하여금 공과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마가를 데리고 가 지 않는 바울의 방식에 바나바는 복종했어야 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복종하는 대신에 자기 의 길을 취했는데, 이것은 그와 바울이 서로 갈라서는 결과를 낳았다. 바울은 바나바보다 더 큰 분량을 가졌는데, 이것 때문에 그는 결국 사역 안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의 이십오 년여 동안 나는 결코 내가 사도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 난 이 몇 년 동안 어떤 형제들은 사도들에 대해 적지 않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우리 가운데는 한 사도가 아닌 많은 사도들이 있다고 말해 왔다. 이것은 수치이다! 1988828일 애너하임 교회의 집회에서 애너하임 교회의 존립에 관한 열여섯 항목 중 하나, 곧 어떤 형제 에 의해 제시된 한 항목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단지 한 사도만이 아닌 많은 사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관심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런 사도들의 명단을 주겠다고 말했다. 한 형제가 청하여 그 형제로부터 그 명단을 받았다. 그 명단에는 일곱 이름이 포함돼 있었는데, 그 이름 들 중 하나의 옆에는 의문 부호가 붙어 있었으며, 그 명단을 준 사람의 이름은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 명단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오래지 않아서 나는 타이베이로 가서 그곳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도들에 관하여 메시지를 전했다(<적시의 나팔소리와 현재의 필요> 참 조). 그 명단에 있는 일곱 형제는 모두 나의 사역 아래 있었다. 사도들의 종류의 관한 진리에 따르면, 그들은 주님이 직접 임명하신 사도들에 의해 산출된 디모데, 디도, 실라 등과 같은 사 도들일 것이다. 이 메시지가 출판된 후에 오늘날은 사도들이 없다고 하는 또 다른 말이 나돌 았다. 이것은 존 넬슨 다비가 가르친 것과 유사하다. 나중에 여전히 오직 열 두 사도주 예 수님이 택하신 열 한 사도와 바울 밖에 없다고 하는 또 다른 말이 떠돌았다. 사도행전 1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맛디아를 뽑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일어섰을 때(2:14) 그는 맛디아를 포함한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섰다. 이러한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대로 말하는 것이며, 진리의 표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함

 

과거에 또 다른 분열적인 요소는 주의 회복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소홀히 한 것이었다. 19862월의 장로 훈련에서 나의 부담은 장로들에게 주의 회복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주의 하도록 당부하는 것이었다. 사백여 명의 형제들이 한마음 한뜻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나 에게 보증하는 편지에 서명했다(장로 훈련( ), 주님의 현재의 움직임의 생명 맥박, 참조). 러나 과거 삼 년 동안의 배역에서 몇몇 형제들이 그 편지를 정죄하면서 심지어 그 편지의 한 부분이 이단적이라고 말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나에게 그 편지에서 그들의 서명을 제거하겠 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한마음 한뜻의 참된 의미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들이 그것을 멸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위에서 언급한 과거에 감춰져 있었던 분열의 요소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소홀히 함이 있었다는 강한 증거이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현재의 소요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한마음 한뜻을 소홀히 한 결과이며 그것의 완전한 나타남이다. 이런 나타남은 배역적인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나를 침묵시킬 때까지 싸우겠다고 사람들에 게 명확하게 말할 정도로 진전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한마음 한뜻을 주의하지 않으리라는 것 을 강하게 보여 준다. 이것은 확실히 감춰진 분열의 요소이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현재의 소요는 단 하루 만에 발전된 것이 아니다. 강에 있는 얼음은 몇 피트의 두께가 되기 전까지 일정한 기간에 걸쳐서 얼음이 축적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황 가운데서도 수년에 걸쳐서 일정한 양의 불쾌한 것이 축적되어 왔다. 초기에 내가 반대나 비판 에 관하여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은 내가 타이베이에서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1987 12월에 돌아오고, 형제들이 그들의 계획에 따라 어떤 요구들을 하려고 했을 때, 나는 무언 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사실상 그들의 공모였다.

 

원칙적으로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소요와 문제들은 두 근원, 곧 인간적인 근원과 사 탄적인 근원으로부터 온다. 과거 삼 년에 걸친 우리 가운데서의 상황을 관찰하고 고려한 후, 나는 이 소요가 악한 자, 대적, 사탄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13:19, 28). 그것은 사역을 파괴하고 새 길의 문을 닫기 위해 흑암의 영역으로부터 온 어떤 것이다. 사탄 은 사역을 미워하고 또한 새 길을 미워한다. 새 길과 함께하는 사역은 악한 간계를 가진 대적 에게 큰 봉쇄선이 된다. 그러므로 사탄과 악한 영들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아주 강하게 움직인다. 그 결과 어떤 형제들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히고 이용되어 전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 적이고, 비인간적인 일들을 하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내가 늙어서 더 이상 사물을 분명 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이 소요가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 준다.

 

그렇지만 소요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지구촌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여전히 적극적으로 전진하고 있다. 장로들의 집회에 출석한 장로들이 제출한 그들의 교회들의 현재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들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이 보고서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회복 안의 교회들의 현재의 상황>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최선을 다하여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에서 나온 증정본을 얻기 바란다.

 


아벨정
2017-07-06 11:31:31   추천
배역은 방화범이 하는 범죄이며 누구도 자기집에다 불을 지르지않고 배역자가 집에 방화하면 소화기를 든다 배역도 교회를 정화하고 강화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의 안배이다 집인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내가 아들이면 방화범의 반대편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