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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3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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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장에 대해서 여러갈래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형제"란 분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정도 동조를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사도행전의 이적과 연관된 영적은사가 고전14장에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문맥의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현재 지방교회의 실행과 동일한 의미인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할수도 있습니다. 만약 같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습니다.
방언(명백한 초자연적인 외국어)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같은 초자연 적인 뜻으로 이해를 하는게 정상일겁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가 기록된 시기가 시도바울의 기적이 있엇던 때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후천적인 습득으로 인한 방언(외국어)이라면 영적은사의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병고침은 사도행전에 보면 즉각적인 고침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의 암병동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곧바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신유집회니 은사 집회니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즉각적인 이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지방교회의 대언이 고전14장의 실행이라면 초자연 적인 방언과 병고침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형제"님은 순복음교회나 성락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그런 것(방언,신유)들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성경과 비추어 보면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진리 비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은사의 형평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을 즉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는 역사적 과정을 신앙의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디모데전서나 디도서를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를 질문 드린겁니다.(그렇다면 행전이나 그외 복음서는 필요가 없는가 라는 질문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전부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적인 예로 오순절날 외친 베드로가 우리의 규범인가? 아니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삼천명이 위치적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어쨌거나 고전 14장은 논란이 남아있습니다.
또하나는 어느분이 지적하셨듯이 사도들의 복음이 전파되어 (어느)지방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면, 지방교회의 논리를 따르면 후차적인 교인들은 거기에 더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회복이라는 논리로 각지역에 지방교회가 세워져서 거기에 더해져야 한다면 그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설립된 교회는 전부 가짜이거나 불충분한 교회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바알에게 무릎꿇치않은 칠천명을 남겨두지 못했을까요? 그 칠천명에새로운 신자들이 더해지는 것이 순서입니까? 아니면 다시 회복이란 이름하의 새로운 (지방)교회에 더해지는게 순서일까요?
일반적으로 지방교회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이런 점 일겁니다. 영을 만지고, 최고의 진리를 알아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과연 초대교회때의 성도들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만큼 영적 지각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방교회와 그동안 토론과 글들을 읽으면서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평범한 신앙이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지방교회를 잘 모르고 집회에 한번도 참석해 보지 못했기에 저 개인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접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딱 꼬집어 말씀드리기는 힘이듭니다. 단지 누군가 표현 한데로 영적 파장이 틀린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