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선지자, 대언자, 예언자, 또는 신언자라는 한국말은
다 영어로 'prophet'입니다. 그러므로 '프로펫'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면 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선지자는 1) 하나님의 말을 받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2) 그들
은 가끔씩 장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미리말함)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내는 것을 '하나님을 말해낸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선지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말씀이신 하나님
을 말하고, 가끔씩 장래일을 예언(사7:14)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1. 선지자, 대언자, 예언자를 언급한 성경적인 사례들
1) 구약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자기는 말할 줄을 몰라서 못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네 형 아론을 대언자
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
(prophet)가 되게 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
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
에서 보내게 할지니라'(출7:1-2).
위 본문은 대언자가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위 우리의 대언자 정의와도
부합됩니다. 물론 아론 이외에 구약의 선지서를 기록한 대소
선지서 기자들이 다 이러한 대언자(선지자)였습니다.
2) 신약
엡4:8,11은 어려 유형의 선물(gifts)중 하나로 '선지자'(prophets)
가 주어졌고 이들의 주된 할일이 성도들을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본다면
저는 그 기능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말을 하는 사람들입
니다. 그러나 구약은 하나님이 선지자 밖에서 말씀을 주어 말하게
했다면, 신약은 하나님이 생명으로 선지자 안에 들어와서 그
사람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말해내는 사람들입니다.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실행입니다. 이것은 항목을 달리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2. 고린도전서 14장의 'prophecy'문제
고전14:1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prophecy (예언, 대언, 신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내용은 다음 두 가지 입니다.
1) 고전 14장의 실행(prophecy 포함)은 지금도 유효한가?
우선 위 질문에 답변을 한다면 고전 14장의 실행은 지금도 유효
합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는 바울의 권면을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리스 님은 고전 14장의 문자적 적용은 초대교회까지이고 현재
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맞느냐고 박만수 님에게 질문
하신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만수 님은 질문의 핵심에 대해
서는 확답을 안 한채 질문과 상관도 없는 (지방)교회 흠집내기에
골몰하신듯한 모습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즉 카리스 님은 (지방)교회가 하고 있는 고전 14장에 있는 신언
(申言, prophecy)의 <형식>이 성경적이냐를 물었는데, 박만수 님
은 신언은 '성경에도 없고, 세상에도 없고 지방교회가 만들어낸
말'이라는 식의 엉뚱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카리스님이
영어로도 표시를 해준 성경용어를 성경에도 없는 말이라니요!!
http://www.antioch.co.kr/Antioch/Qna01/View.aspx?QnaID=1094 http://www.antioch.co.kr/Antioch/Qna01/View.aspx?QnaID=1097왜 신언((申言, prophecy)이 지금도 유효하며 신언하기를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 하는지는 다음 항목에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2)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신언의 의미와 기능
신언의 의미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 말을 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벧전4:11). 그러나 이것은 안티오크측의
우려처럼 성경 66권 이외에 성경에 더 추가될 어떤 말을 한다
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그 말씀을 추구하여 자신의 존재를
통과한 말을 해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에 대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를 해
내는 것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신언은 박만수님의 착각처럼 초자연적인 은사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바울은 누구든지 신언을 할수 있고 또 하려고 하라고 말
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언이 마16:18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교회를 건축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카리스 님은 고전14:4 후반부를 깊이있게 추구해 보시기 바랍
니다. 신언이 교회를 건축합니다. 그런데 엡4:11-16의 문맥은
이러한 교회의 건축(자라게 함)이 일부 은사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기능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스 님은 고전 14장의 내용이 신약교회
성도들인 우리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하셨습니다.
그리고 박만수님은 그런 견해가 건전하다는 식으로 두둔하셨
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
되 특별히 신언(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는 사도 바울의 말을
정면으로 뒤짚는 것입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바울이 권한 신언의
실행이 초대교회 때로 끝났고 지금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티
오크 측이 믿는다면 님들의 성경에서 고전 14장은 사실상 죽어
있는 말씀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 5-7장의
산상수훈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됨으로 이것을 이방인인 우리
에게 적용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말씀보존학회측의
주장과 다를바 없이 성경의 상당부분을 삭제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안티오크측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신언에
대해서 반복해서 권면하고 추천하고 있습니다.(참고로
prophesy를 아래에서는 편의상 '신언'으로 지칭하겠습니다.)
-'신언을 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3절).
- 방언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고, 신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나니
(4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신언하기를 원하
노라(5절).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예언..을 말하지 않
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6절).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19절).
-그러나 다 신언을 말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
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
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24-25절).
-신언하는 자들은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
이요(29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신언할 수 있느니라(31절).
-신언하는 자들의 영이 신언하는 자에게 제재를 받나니(32절).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prophet)나 신령한 자로 생각
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을 알라(37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신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
지 말라(39절).
결론적으로,
안티오크 측은 고전 14장의 실행이 초대교회에
국한되고 지금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재고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14:4에 의하면 신언이
교회를 건축하는 주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을
해냄은 초자연적인 은사도 아니고 이미 완성된 성경과 충돌할
우려도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쓰여진 말씀이 우리의 기도와 추구
를 통해 깨달아진 말씀이 되고, 체험된 말씀이 된후 우리의 입을
통해 믿음으로 다시 말해질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위로와 권면과 책망과 빛비춤이 되어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고
주님께 나아와 그분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
하게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부담을 간과한 채 고전 14장을
가벼운 은사집회의 묘사로 여기거나 초대교회로 마감된 죽은
성경으로 여기는 것은 핵심을 놓친 성경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