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12-24 , 조회수
(294) , 추천
(0) , 스크랩
(0)
고전 14장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도행전을 믿음생활의 규범으로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디도서나 디모데서를 규범으로 삼아야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니면 행전2:41절의 삼천명(비록 유대인이지만)이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될지 베드로가 모델이 될런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장과 14장은 사도행전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병고침이 있었고, 사도가 있었고, 대언자가 있었고, 방언이 있었으며, 통역이 있었습니다. 기록시기도 AD55년 경으로 보고있습니다. 이 시기의 배경은 사도행전 18 장입니다. 고전 16장 8절(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함)은 행전19장 19절 - 20장 20절까지의 사이에 기록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고, 19장에 있어서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이적과 기적이 일어나던 시기)에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에게 이 고린도전서를 쓴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고린도전서를 읽어야 합니다. 특히 19장 11절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통해 특별한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대기만해도 병들이 낫고 악한 영들이 떠났다고 가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12장에서 14장까지의 은사가 분명히 있었으며, 고전1:7을 보면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 점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사이에 고린도에 교회를 개척한후 에베소로 넘어온 후 고린도의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영적 육적 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덕적 타락, 애찬과 만찬의 남용, 자유의 남용, 특히 영적 은사의 남용과 왜곡이 심각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전12장에서 14장까지 사도 바울이 영적 은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고. 책망에 가까운 톤으로 권면과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의 전반적 분위기는 책망에 가까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시대에 존재했던 사도와 이적과 기적이 포함된 영적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승되었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성경자체와 교회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장에서 3장까지 이르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그 어디에도 행전의 이적과 기적과 사도의 연속을 지지해 주는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고(고린도교회의 영적은사 포함), 특히 첫 번째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가짜사도를 시험해서 밝혀낸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디도서나 디모데 전 후서의 명령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를 제외한 어디에도 13장의 영적은사를 언급한 곳은 없습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 전서는 고린도교회에 적용되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도 이런 은사가 사도시대 마감 후 일어났다고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그렇다고 현재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전 14:26: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으며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지방교회의 <집회마다>와 고전14:26의 <다같이 모일 때>와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만약 같다면 지방교회 집회에서는 찬송시, 교리, 방언(타언어), 계시, 통역은 없는 것입니다. 이들 은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 사라지고 대언만 남아있는 것인지요?
또한 15-20명이 나와서 신언(prophecy) 한다는 것은 29절의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말하란 성경 말씀과 상치되고 있습니다. 26절부터 31절까지 보면 27절에 먼저 방언을 언급하고 두 세 사람이 할 것이며 한사람은 통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28절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잠잠하라고 했고, 다음 순서 29절이 대언인데 이 역시 두 세사람으로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모일 때는 <1)두세 사람의 방언 - 통역 2)두 세사람의 대언 - 다른 사람은 판단>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고전14장 26-31절의 순서도 따르지 않을뿐더러 두 세사람으로 국한 시킨것을 굳이 15-20명으로 늘리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 시기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고 여기서의 대언(prophet)은 성경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배움을 주고 위로 받게 하자는 것입니다(고전14:31). 방언이 있었고 통역이 있었으며 대언이 있었고 교리와 계시가 있었습니다. 지방교회의 신언(prophecy)과 비교해 보면, 다른 은사 즉 계시, 방언, 통역, 교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대언(prophet)만 강조한다면 다른 은사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지껏 답이 없습니다.
제 견해는 이 시대에는 선견자나 사도가 필요없습니다. 그들 선지자나 사도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