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11-28 , 조회수
(386) , 추천
(0) , 스크랩
(0)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이전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님의 말처럼 율법시대의 기간은 모세로부터 주님에 이르기 까지 약 2500여년으로서 아브라함의 때 보다
약 580년 이후에 시작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이 기사를 인용합니다. 마찬가지 논조입니다.
율법과 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김을 받았으며
율법과 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율법이전의 야곱도 십일조를 드리겠다며 하나님앞에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성경을 잘 아시니 몇 장 몇절을 표기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필요에 따라 취하고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필요가 없으니 취하지 말까요?
십일조를 이데올로기화 하는 인간이 문제지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입니까?
저는 소위 "주의 종"도 목사도 전도사도 뭐도 아닙니다.
저는 "평신도"입니다.(이런 단어 자체가 우습지만,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인 것을...)
제가 이런 글을 쓴다해서 저에게 몇 푼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제 입지가 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수호되어야할 성질의 것이기에 이렇게 또 글을 올립니다.
또 율법을 말씀하시길래 한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율법의 참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더 깊이 내려가 형제에 대하여 노하지 않는 것이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더 깊은 의미로 음란을 품고 자매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는 말은 이혼증서도 없이 아내를 내 쫓아서 사회에서 매장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배려입니다.
헛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은 더 깊은 의미로 아예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눈이 상했다고 정도를 넘어서 사람을 죽이거나 더 이상의 상해를 가할까봐 주신 계명이지
원뜻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만 하지 않으면 살인해도 괜찮습니까?
음란한 마음만 품지 않으면 간음해도 괜찮습니까?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해도 좋습니까?(간음외에는 이혼이 불가하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더 깊은 의미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바쳤던 과부가 있고 평생동안 모은 향유옥합을 깨뜨린 마리아가 있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말씀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다시말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므로 십일조는 안해도 괜찮습니까?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마태복음 23장 23절의 십일조와 상관이 없다고 칩시다. 그럼 야곱의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개인의 돈 분야에 관한 신앙고백과도 같습니다.
님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는다면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 23장만 읽어봐도 1절 부터 12절까지는 율법에 관한 것이지 은혜와 관계없는 것이므로 "섬기는 자"가 될 필요없고 .....
23절에서 24절 까지는 율법에 관한 것이기에 "십일조"할 필요없고
25절 26절까지는 율법에 관계된 것이므로 "먼저 안을 깨끗이"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현재에도 있는 외식에 대해 많은 경고를 줍니다. 저는 차라리 이 23장을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를 강조하고 광고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이지 원래의 의도는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면서도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주님의
섬김의 정신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님의 십일조에 대한 자유는 님 만이 가지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님의 견해를 듣고 갓 믿은 사람들은 "십일조 안해도 된다더라"하고
자신의 돈은 자신의 것이니 맘껏 써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께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대상 29:14)
차라리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십의 십조를 드리고 그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돈 쓰는 것에 대해
일일이 간섭을 받고, 자식이 용도를 말하고 부모에게 용돈을 받듯 하나님께 용돈을 타쓰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지금도 십의 일을 바치고 할것 다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십의 일이 내것이면 십의 구는 누구의 것이냐?
십일조는 구약의 것이고 의무가 없다고 내기를 거부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당하면 한푼이 두려워 벌벌떠는 자들에게는 십일조가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말씀 잘 새겨 들었습니다. 십일조도 그렇고 헌금이라는 것은 아무나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즉 돈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헌금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저는 십일조를 냅니다. 사실 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해서 저는 내고 있습니다. 내기 싫으면 안내면 됩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내기 싫으면 안내면 됩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본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신앙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돈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입니다. 그래서 이렇든 저렇든 하나님의 복음에 쓰여진다면 어떠한 이름으로 내든지 감사 할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헌금의 종류가 이렇니 저렇니.. 다행이도 십일조가 원래 없는거니 뭐니 하는 것은 괜히 돈이 아까워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복음에 어떻게든 사용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헌금의 종류가 이렇든 저렇든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중요한 포인트를 복음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 주위에도 그렇게나 돈이 아깝던지 돈에 벌벌 떨면서 헌금을 내기 두려워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있던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둔 사람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째째하게 이런 헌금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 어쩌니 그런 걸로 따지는 것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지 못할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하나님께서 모든걸 책임지시고 주신 돈인데 심으면 심을수록 몇배 몇천배까지도 다시 돌아오는 돈인데 너무 그렇게 따지지 맙시다. 내기 싫으면 내지 마세요.
롬 11장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