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11-18 , 조회수
(334) , 추천
(0) , 스크랩
(0)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들레지 않다란 야단스럽게 떠들지 않았다 라는 뜻이다.
주님의 초림은 구약의 교회를 신약의 교회로 전환함에 있었고 그 가운데 구약교회의 개혁은 필수였다.
개혁이란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말은 달라도 뜻은 같은 것이나 회개라는 말이 더욱 개혁의 본질적인 의미를 두고 있다.
주의 공생애 시작은 회개하라는 메시지에서부터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신약교회의 주인공이 되려면 이 회개의 관문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의 개혁이 들레지 않은 것은 주의 말씀에 찔린바된 양심은 회개와 함께 영적인 변화로 교회의 무리가 되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육신 적인 시끄러움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 말씀을 받지 않고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의 양심이 주를 비난하고 희롱하며 들레었던 것이나 주에게서는 이러한 들레임이 길에서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의 교회는 무엇을 개혁하자는 것인가?
말세교회의 타락상에 물든 것에서 돌아서고 더 이상 물들지 말고 단체나 개인이나 초대교회의 순수로 돌아가 말씀중심신앙으로 살자는 것이다.
이렇게 회귀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회개인 것이다.
개혁도 같은 의미에 말은 되지만, 이 말은 제도적, 방법적, 수단적인 행위 전환에 그 의미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개혁의 진정한 의미인 회개로 대용하기에는 약간의 무리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단어에 있는 것보다는 말씀으로 죄와 허물에 대한 지적과 진리의 역(易) 가르침에 분명해야 하며 또 이러한 지적 앞에 수용을 위한 변론이 아닌 육적 들레는 것이 문제이다.
정당한 변론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시끌벅적한 들레임으로 나서는 신앙의 속됨이 문제이다.
주 앞에 이러한 들레임으로 망한 이스라엘과 유대의 지도자를 생각해야 한다.
개혁은 이러한 큰 소리로 진행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들레이는 목소리는 들레임의 개혁이 되어 그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제 자신이 그리로 들어가서 스스로 망하는 행위인 것이다.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살기 위한 애쓰는 노력이 들레지 않는 영적인 주의 개혁이 되어 자신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영음이 되어 듣게될 것이며 이로서 참다운 교회개혁이 나의 것이 되는 주인공이 될 것이며 동시에 신약교회의 순전함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교회 역시 들레지 않게 개혁은 착착 진행이 되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144000이 될 것이며 이 비밀을 얻지 못한 자들은 계속하여 육적 들레는 개혁으로 나오게될 것이다.
이것을 이때에 허락한 예언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지금 보는 그 눈이 복이 있을 것이다.(계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