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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5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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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의 양은 출애굽을 위한 양으로서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완전 해방되기 직전에 힘을 얻기 위한 양식으로서 유월절 양을 먹는 것이란 평소에 양을 먹는 기쁨은 비길 바가 못된다.
신약으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우리들의 회개를 계시한 양과 쓴 나물이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세상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지는 기쁨은 천국의 기쁨인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기쁨은 죄의 쓰디쓴 맛이 함께 하는 회개가 수반되어짐도 필수이다.
이러한 주는 우리들에게 꿀 같은 기쁨의 대상이지만 언제나 쓴맛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성도가 된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쓴맛은 평생에 함께 하게 된다.
성도가 되기 위한 처음 회개의 쓴맛은 죄의 뿌리에 대한 맛인 것이며 이후로는 이 죄의 뿌리가 다시는 자라지 못하도록 육신의 정욕을 제어(control)함에 있는 것이며 이 제어를 위한 영혼의 활동에 대하여 여전히 반발하는 육신에 따른 곤란은 쓰디쓴 맛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이 얼마나 심한지 바울은 이에 대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까지 하였다.(벧전2:11, 롬7;24)
사도 요한도 이에 언급하기를 내 입에서는 꿀 같이 다나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하였다.(계10:10)
우리 또한 말씀으로 받는 은혜의 기쁨이란 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늘 육신을 제어하는 능력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것이며 이에 육신은 반발의 쓴맛을 우리들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이는 주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 세례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앙의 큰 부담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부담에 자유 하거나 소홀히 할 때 죄의 쓴 뿌리는 자라기 시작하고 부패에 이르게 되어진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또는 제어하기 위한 일념으로 이를 미워하되 철저히 미워하게 되어지는 것은 죄의 뿌리가 내어놓는 쓴맛에 대한 심령이 상한 애통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애통이 진정한 회개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의 이런 진정한 애통이 있을 때 비로소 죄와 허물에 대한 악한 효력의 활동이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는 철저한 단절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관념적이며 습관적인 회개의 입술은 회개의 모양은 되나 결코 능력은 되지 못한다.
우리가 회개의 능력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말씀이 꿀같이 단 은혜의 부족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단 꿀 같은 은혜와 회개의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교회와 개인은 세상에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