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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0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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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지 못하는 이유는 육신에 정욕의 방해로 인함이다.
모름지기 우리의 받은 세례란 이 정욕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됨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삶에는 옛 사람의 정욕에 대한 배제를 철저히 해야할 신앙에 의무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도로서 이러한 세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에 따라 자신에 일상이 이 틀을 벗어나지 않도록 생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부패는 바로 이에 대한 실천력 저하에 따라 비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성도들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할 지도자에게서도 이러한 현상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들에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세례에 대한 교훈을 입과 지식으로 알고 이에 의지한다면 세례의 능력에는 이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이르지 못하는 부족함에 대하여 성화의 단계를 핑계삼는 구실로 삼는다면 세례의 능력에는 점점 더 멀어지게될 것이며, 이에서 교회의 부패는 더욱 심화되고 교회본연의 모습은 갈수록 더욱 퇴락한 모습으로 나타나게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이러한 모습 앞에 개혁을 외쳐보지만 성경은 이미 이에 대하여 회개하라는 경고로 성경전체를 통틀어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지적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한 결과로 인하여 굴절된 열매가 나타난 실제의 현상이 부패인데 여기다 대고 아무리 개혁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개혁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세례의 능력에 대하여 과연 믿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에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세례의 능력이 자신에 육신 적인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그 능력이 제 몸에 머물게 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를 준수하지 않으므로 부패에 빠지고 결국 영,육이 죽는 믿음의 형식으로 끝이 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자신을 엄중히 돌아보아야 할 것에 대한 교훈 앞에 두려움에 필요성을 제시하고 제시를 받는 것으로 더 이상 무력한 개혁으로 들끓는 소리를 무색하게 해야할 것이다.
세례의 능력을 한없이 성화의 단계에 맡기는 어리석은 신학적 지식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부터는 세례의 뜻을 분명히 알아 하루에 자신의 정욕을 살인하여 적금하듯 적립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하루가 평생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패가 있을 수 없고 개혁이라는 외침도 필요치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개혁을 운운하기 전에 성경을 엄중히 바로 알고 바른 교육에 치중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개혁에 뜻이 있다면 성경의 뜻을 제대로 알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 말에 구체적인 한 예를 들면 신약시대에는 십일조 헌금 명목이 성도의 의무에서 분명 사라진 헌금이라는 것을 일단은 바로 알고 바르게 가르쳐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 아니 생명까지도 주의 것이니 라는 등으로 십일조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의 표식이라고 하여 은혜와 율법의 가름에 대한 지식에 분명치 않고 이와 같이 어정쩡하게 얼버무려 십일조를 합리화하는 교훈으로 신약의 십일조를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진정 막중한 세례의 의무에 가르침에는 등한하고 불필요한 십일조 의무에 대하여는 막중하게 언급하는 주객이 전도된 매사 성경을 이런 식으로 가르침에 의하여 교회의 부패가 더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각자 자신에게 물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