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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8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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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른을 지식 적으로 가르칠 수가 없듯이 세상학문 식으로 진리를 가르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육으로 영을 가르치려드는 것과 같은 것이며, 육안으로 영안을 대신할 때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가르침은 영혼에 대하여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듣는 자의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차가운 소름이 돋는다.
간혹, 이런 가르침에 호응 자들이 나타나면 이런 현상은 배가된다.
오늘날 이런 가르침의 설교자들은 듣기 좋은 말에 열거와 결론이면, 그에다 육신 적인 감동이 절정에 이르는 화술이면 제 스스로 훌륭한 한 편의 설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논리와 논지마저 뒤죽박죽이며, 동시에 부자연스런 문장의 연결일지라도 듣기 좋은 말이면 된다는 식이다.
결국 이런 가르침은 도덕과 윤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아예 심리학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이를 진리에 덧붙이는 설명에 접목을 한다.
철학에 유입은 이제 고정멤버와 같은 것이다.
세상학문의 사고 적, 진리 이해는 이제 그 도가 지나치고도 남음이 있는 때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결국은 아무리 박식할지라도 영으로 보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다.
세상학문을 즐기는 인텔리일수록 이러한 유형에 깊이 빠져든다.
진리는 진리에 반응하고 학문은 학문에 반응한다.
믿음은 진리에만 반응하고 학문에는 무 반응할 뿐 아니라 도리어 대립의 국면에 처하는 것이다.
믿음은 진리에 반응하는 자연적인 속성에 의하여 행함의 반응 역시 자연적인 것이다.
오늘날 이구동성으로 교회 안에 빛과 소금은 있어도 교회 밖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을 하는 것도, 엉뚱한 말과 이해와 가르침에서 오는 기현상인 것이다.
즉,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에 의하여 단체에 속하였을 때만 잘 나타나는 빛과 소금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p.s
오늘날 이러한 가르침에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면면히 보아오고 있다.
그들이 불쌍하기보다는 의분에 격해지는 것은 성도의 믿음을 죽이면서도 평생에 목회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러한 목사들이 얼마나 즐비하게 많은 시대인지...
가슴아프고 괴로운 시대를 허다히 보고 살아가자니 심령이 답답하여 동동 구르는 발로 산다.
"이 일을 어찌할꼬"가 과제가 되었고 우리 모두에게 해결할 숙제로 대두되는 때이다.
하여, 교회개혁의 중요성이 우연히 떠도는 말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