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든콘웰신학교 부설 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 약 4만 개의 기독교 교파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국에는 예수교장로교단(예장)만 300개가 넘습니다. UCLA 옥 00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 장로교인 수는 전체 기독교인 25억 명의 약 0.5 퍼센트이고 그 절반이 한국에 산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계의 주류인 이 장로교인들의 소위 정통 교회 소속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물론 초기 교회 때는 그 어떤 교단도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개신교단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칼빈이나 요한 웨슬리는 자기를 따르는 별도의 교단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저의 요점은 특정 단체 소속 자체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혼돈의 시대에는 과연 신앙인으로서의 현재 자기 모습이 절대 기준인 성경에 부합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특히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해 보고, 둘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볼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족장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이집트에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시면서 …
이집트와 자기 온 집을 다스리게 했습니다(행 7:9-10).
아침에 위 본문을 읽으면서 요셉에 대해 더 알고자 구약 창세기 관련 장들을 더 추구했습니다. 참고로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창세기에 나오는 핵심 등장 인물 아홉 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1. 아담(하나님의 목적, 사람의 타락), 2, 아벨(하나님께 되돌아감), 3. 에노스(주님의 이름을 부름), 4. 에녹(하나님과 동행), 5. 노아(하나님의 통치), 6. 아브라함(믿음으로 의롭게 됨), 7. 이삭(상속된 축복을 누림), 8. 야곱(변화된 사람), 9. 요셉(생명의 성숙과 다스림). 또한 그는 이 인물들이 갖는 특징들이 타락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과정에서 체험해 가는 항목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위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위 아홉 명 중 마지막 두 사람인 야곱과 요셉, 그리고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사도 바울의 삶이 합쳐진 것이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임을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 세 인물에 관해 추구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1. 야곱: 요셉을 알려면 야곱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는 이 둘을 마치 한 사람의 기록처럼 뒤섞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체험을 보더라도 (요셉의 특징인) 생명의 성숙과 다스림은 (야곱의 특징인) 고난을 통한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얍복강 가에서 그의 “엉덩이뼈가 어긋난”(창 32:25) 체험인 ‘타고난 힘이 처리받음’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의 이름은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다’라는 야곱에서 ‘하나님의 왕자’(a prince of God, 엘리코드 주석 참조)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28 절, 35:10). 이것은 그가 외삼촌의 부당한 괴롭힘, 자식들을 통해 온 고통,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 등의 고난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2. 요셉: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인신매매 당하여 이집트에 팔려간 후에, 노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늘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즉 그는 1) 파라오의 호위 대장인 보디발의 집과 2)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과 3) 이집트 전체를 다스렸고, 4) 두 번의 꿈 내용처럼 자신의 형들로부터 절을 받았고 5) 자신의 정욕과 감정을 자제하고 다스렸습니다(창 39:2-4,12, 23, 41:38, 40, 43:26, 30-31).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본문들에서 볼 수 있듯이 요셉이 다스릴 수 있었던 권위와 지혜는 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의 이러한 임재는 (야곱에서서 볼 수 있는) 변화와 성숙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은 야곱의 연장이었습니다.
3. 사도 바울: 대표적인 신약 사도였던 바울도 살 소망까지 끊어질 만큼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고후 1:8, 11:23-27). 또한 그를 압송해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백부장이나 선원이 아니라 죄수 신분의 바울이 그 상황을 다스려 276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행 27장). 이런 다스림의 근원 역시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었습니다(23절).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처럼 개인적인 믿는 이로서 겪는 고난과 다스림 외에, 몸인 교회에 대한 이상 아래서 지역 교회들을 돌보는 단체적인 방면이 더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추구를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보게 되었습니다. 1) 나는 고난을 없애주시라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고난을 통해 변화되고 주님을 더 얻게 해 주시라고 구하는가? 2) ‘환도뼈’가 ‘위골’된 적이 있었는가? 3) 매일의 삶에 주님의 임재와 말씀하심이 있는가? 4) 육신의 정욕과 천연적인 감정을 다스리는가? 5) 바울처럼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되시는 한 새사람이 나의 교회관인가? 5) 한 지역교회를 섬기는 것이 절대적으로 주님의 몸을 건축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동기와 목적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도 섞여 있는가? 이런 자문을 해 볼 때 참으로 주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겨주심이 필요함을 깊이 느낍니다.
오 주님, 고난을 통과할 때 당신을 더 얻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도록 당신과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게 하소서.
당신의 갈망이요 기쁨인 교회가 나의 갈망과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