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비움, 부인 등등)은 소리가 요란하다
성경진리토론방
, 2004-09-21 , 조회수 (24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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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근원이신 주 예수여! 홀로 영광 받으심이 합당 하나이다.”

초대 선진들의  기본 바탕을 잘못 기술하지는 아니했을까
그리고 그 전달 표현의 미숙함을 다시 뒤돌아본다. 
       
빈 그릇(비움, 부인 등등)은 소리가 요란하다.

빈 깡통은 두드리는 데로 소리가 난다.  이에 시끄러워 발로차면
더욱 소리가 요란하며 더 나가서 깡통의 본연의 임무는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빈 깡통에 모래를 담으면 소리가 그치고 명칭은 모래깡통이라 하며
용도는 방호사로 또는 빙판 방지에 사용된다. 따라서 취급(가치)도 달라진다.

  [대 기 만 성], 이 말은 즉, 큰 그릇은 늦게 찬다는 뜻이며
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종교나 철학이나 고금동서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는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이 사람이라는 그릇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온갖 것들로 채워진다.
통로와 대상도 다양하며 알게 모르게, 또 어떤 것들은 힘과 재물과 시간을
드려가며 채우고 또한 종류와 가치도 천차만별이요 그 수는 백사장의 모래이다.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을 이고지고 인생길을 출발하여, 가고 안 가고는  자타의 
토를 달지 못 한 채  종착역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이 여로에는 다양한 오아시스 같은 쉼터의 종교가 철문을 굳게 닫고 통과조건을 제시한다.
모든 종교는 단합이라도 한 듯이 한결같이
자기의 모든 것들을 비우고 자기 자신 까지도 부인하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불교의 승려다.
그들은 과거와 처자들, 재물은 물론이요 심지어 자기의 외형까지도
자기의 뜻이 조금도반영이 안 된다.
이들은 자신의 것들을 남김없이 비웠고  자기 자신까지도 철저히 부인했다.
방법은 초달과 반복 훈련이고  상당한 댓 가가 수반되는 반면 자아처리는 타의 불허다.
이 빈 그릇들은 비움의 철학을 담아 남들을 휘둘러 댄다.
이들은 비움의 철학이 높을 수 록 고승 축에 든다.

그리스도의 문도 통과 조건은 위와 동일이다. 
비우고 부인해야 된다.

반면, 기독교의 평균 수치로는 여호와의 증인이 압도적다.
이들은 처와 자식들을 그리고 자아처리가 잘되어 비움에는 하자가 없다.
대화법과 인격도 일품이다.
비움을 자처하는 그리스도 그릇들은 증인들에게 서열로 치면 조족지혈이다.
그러나 이 그릇(여호와의 증인)들은 피조물을 담고 있다.

이로 보건대 비우는 것도 중요 하지만,
비운 그릇에다 무엇을 담아 채우느냐 하는 것이 더 큰문제다.

또, 그릇에 담아 채운대로 증표(소리)가 다르게 나오기 마련이다.
어떤 그릇은 심심유곡에서 불경을 채우고  조용한 새벽에 깊은 계곡을 목탁소리로 메워  증표를 삼았다
어떤 그릇은 기독교를 담고는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걸어놓고 그림으로도 그리고 또 손에 들고 온통 철갑을 해서 형상을 증표로 삼는다.

어떤 그릇들은 사람들을 담아 채우고는 누굴 담고 있는지를 이름을 불러대며 충만을 표했다.  그 대표로,  이북의 오지그릇들은 목에 핏대를 세워 “위대한 수령 동지” 또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어버이동무”이런 말로 시작을 해서 괴뢰 [김 일성]의 이름을 부르지져 대며 광분 적 인간숭배의 노름을 자행했다.
또 어떤 그릇들은, 이 만희, 김 기동, 조 용기, 등을 담고 그들의 이름을 드높이고 고귀히 간증한다.
조 용기는 무엇이며 김 기동은 무엇이냐.  사람을 자랑하며 그들의 종노릇을 하는 구나.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이뇨.....” (고전3;5)

1세기초대 선조들은 자기의 것들과 자신까지 온전히 비우고 예수로 가득 채워
주, 예수를 미친 듯이 불러대다가 제사장들이 파송한 사울과 같은 자들에게
옥으로 끌려가 죽음에 처했다. 

또 한 어떤 그릇은, 욕심의 원대로 채우려고 살인과 방화를 직업으로 삼았던 뚝배기는
타의로 비워졌으나 맨손으로 십자가상에서 그 약속의 이름을 “예수여”라고 불러
구원을 받았다. 
부르지저 라는 로그를 가진 이 미련 뚝배기는  정통을 자처하는 장감성에서 율법을 담고  일명 구원 파 에다 율법을 버리고, 그 후  자아처리. 비움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그릇들을 만났다.

[비 움]이라는 평범한 이 단어가 너무나 순수하며 토박한 것이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또한 시의적절한 때였다.
.....“비 움”, ..... 이 한마디는 뼈와 살을 온전히 흘려 내렸다.
구원 파 에서 받은 반쪽 같은 구원마저 녹아 흘러내려 버렸다.
참 신기하다. 완전자동이었다. 
저 승려들은 왜 저토록 힘을 들여 비우는가? 미련스럽기 그지없이 보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빈 그릇(뚝배기)에 이상한 소리가 요란하게 나타났다.
다른 그릇들의 비움(자아처리)은, 
이론이요
지식적이요 
가식이다,
실제의 체험이 없고 맛을 못 느껴본 그릇들이다.
오직 나만 깨끗한 공기다
마음이 놓이질 아니한다.
심지어 나를 비움과 자아처리를 지도해준 선배까지도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심령의 고막을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재차 발견하게 되었다.
즉 구원파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구원을 인정 안 해주듯이
주위의 모든 질그릇 들은 이 뚝배기의 비움을 인정 안하고
이 뚝배기는 주위의 질그릇들을 인정 안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로가 비움의 고수인양.
또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은,
그릇을 비우기를 종용하고는 남의 주석을 채워주는가 하면
심지어 자기가 들어오려고도 한다.
비웠다는 그릇들이 싸울 때는 의자를 던지고 욕도 잘한다.

많은 그리스인들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이 말씀과 고전13장의 부담을 안고
암송하며 자기를 부인하려고 애를 쓰는 이들 앞에 비움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비움의 도가 따로 있어 더 높은 양  지적 표현을 동원하여 이들 앞에 진설했던
세월들이 약 23여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 앞에 서서 다시금 비움의 단어를 음미하니 격세지감이다.
그 후  비우라는 종용의 방법을 바꿔,
현재 자기가 담고 있는 것들보다 월등히 값진 것을 찾아주면
스스로 비우는 방식을 채택했다. 예상대로 적중했다 

일전에, 140000을 기술하면서 행여 이 선조들은 자기를 비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이마에 이름을 조각한 것처럼 잘못 표현은 되지 않았는지 또는
그들은 자기 생명을 비움에다 허비했는지 아니면 주의 이름을 위해 허비 했는지
목숨을 바친 곳이 신앙의 핵 일 것이다.
전달이 정확히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재조명해본다. 

다시 한번상기하자
(필 참조 창11;4)
바벨탑을 높이 쌓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계양하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다가
망했다.
우리도 140000처럼 나의 최고로 높고 제일 잘 보이는 곳, 곧 그 이마에
주님의 이름을 계양해 드높이자.
예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은,
모세의 입장과 같았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나(사람)의 그 어떠함에 있지 않고 당신의 일방이다.
모세는 애급으로 보내짐이 두려워 무딘 입술을 핑계 댄다.
사실 보통 담력이 큰 자아니고는 모세의 입장에서 애급으로 회향한다는 것은
불나방과 다를 바가 없다.
애급에 있는  동족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애급사람으로 오해를 해서 이단시하며
불신 할 터이고,
바로왕의 일가는 물에서 주워온 놈이 자기의수족 같은 감독을
처 죽인 것을 알고 히브리인의 본성으로 간주하여 만나며 죽일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인자와 능력을 맛보자.
모세의 무딘 입술을,  달변가 아론으로 대치해 주시는 배려와 또 마음을 푸~우욱
놓이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오히려 가고 싶도록 능력을 챙겨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맞설 자 그 누가 있으랴

오늘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전하면,
여호와 안식일 장 감 성들이 하나같이 똘똘 뭉쳐 조롱 비방하는지,
차라리 지금 같으면..... 살육도 사촌 같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딤후1;15) 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안위를 보라
  *(마19;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가 있다.

이제 말에나 일이나 다 그 이름으로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자.
       
            “주!  예 수 여! 당신에(의) 이름을 드높이 계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