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수 목사의 ‘기쁜소식선교회’ 소속 이한규 TV의 비판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반론
“성령은 언제 우리에게 임하는가”라는 제목의 유튜브에서 이한규 목사라는 분이 지방교회 측의 성령론 등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 성도가 알려왔습니다. 그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가 성령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위 구원파 단체의 강점으로 알려진 의인 개념에도 심각한 오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구분하는 죄(sin)와 죄들(sins)의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단체 구성원들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구원의 초점을 죄 사함에만 두고, “이미 화목하게 된 우리”가 “더욱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음”(we will be saved in His life)에 대한 조망이 없다는 것입니다(롬 5:10). 아래에서 관련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다뤄보겠습니다.
1. 이한규 목사 그는 누구인가?
인터넷에 소개된 이력을 보면, 이한규 목사는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1984), 모 여고에서 8년간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박옥수 목사 측이 만든 ‘한국기독교연합’(KCA) 교육 전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주로 기쁜소식선교회 관련 단체에서 교육 혹은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언제, 누구에게서 목사 안수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현재 ‘기쁜소식(선교회) 안양교회’ 담임목사라고 합니다.
2. “성령은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의 방면이 있다”
그는 한 지방교회 측 성도와의 대화에서 그 성도가 위와 같이 말하자, 자신이 ‘기독교 역사상 복음주의자들의 간증과 말씀을 많이 읽어 보았는데 그런 교리나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자신의 유튜브에서 반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구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호칭들을 긴 시간을 들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지방교회 측 성도들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성령 관련 내용은 이한규 목사가 처음 접하거나 아니면 성경에서 읽긴 했겠지만 깊이 연구한 적이 없는 말씀들일 것입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
먼저 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방면(요 14:10-11)과 그분의 일하심의 방면(갈 4:4)을 말씀합니다. 전자를 ‘본질적인(내재적) 삼위일체’, 후자를 ‘경륜적(경세적)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한편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요 8:16)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두 방면을 함께 표현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런 용어들은 정통 교부들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었고(이종성, 삼위일체론, 649쪽), 장로교 합신 측 이승구 교수 등 최근의 권위 있는 신학자들도 이런 개념을 인정하고 더 발전시키고 있습니다(https://byk2739.tistory.com/342). 이러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아래에서 다룰 성령의 두 방면에 대해서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령에도 본질적인 영의 방면과 경륜적인 영의 방면이 있음
위 삼위일체론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도 성경은 존재론적인 방면(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방면(경륜적인 영)을 구분하여 언급합니다. 이한규 목사는 이에 대해 ‘성령이 두 분이냐’라고 반문했습니다. 물론 성령은 한 분입니다(엡 4:4). 그러나 아래에서 보겠지만, 성경은 이 한 성령을 두 방면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는 하늘 보좌 위에 계시지만, 이 땅에 사는 그분의 몸의 지체들의 생명으로서는 그들 안에 계신 것과 같습니다(롬 8:34, 10, 골 3:4, 행 9:4).
성령의 잉태와 침례 시 성령 강림: 성경은 주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고 말씀합니다(마 3:16). 그러나 성령은 본질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이미 주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 1:18). 즉 주님은 그분의 존재와 생활을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나셨고(눅 1:35, 마 1:18, 20), 사역과 움직임을 위해서는 경륜적으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입니다(마 3:16, 눅 4:18).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이 두 방면 모두를 믿고 아멘 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또 다른 사례는 부활 후에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십시오”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은 그로부터 50일 후인 오순절 때 성령이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말씀합니다(4절). 그렇다면 성령은 이 두 시기 중 언제 사람에게 임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 점이 현재 양측의 주된 쟁점입니다.
이 두 사례를 어떻게 조화되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신약 전공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어왔습니다. 그중에 서울신대 대학원생 김유미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1995)에서 “요한복음의 성령은 개인적이며 … 내재적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외형적 은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라고 설명합니다(https://3311.tistory.com/115).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성령을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의 방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과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으로 설명한 사례가 성경이나 신학자들에게 전혀 없었다는 이한규 목사의 주장은 자신의 좁은 경험에 따른 것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3) 요한복음 16장 7절의 ‘내가 떠나간다’는 말씀에 대한 심각한 오해
이한규 목사는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때는 부활 후이지만 아직 하늘로 ‘떠나가지’는 않으신 시점이므로, ‘내가 떠나가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말씀(요 16:7)과 모순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16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떠나) 간다’ 혹은 ‘다시 온다’는 표현은 십자가로 죽으러 가시고, 부활 후에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지, 이한규 목사의 오해처럼 승천과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와 같이 해석하면 아직은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이니, 1) 이 목사 본인과 그의 소속 단체 구성원들은 현재 “고아처럼 버려진 상태”이고(요 14:18-19), 2) 주님은 저 하늘 어디에서 2천 년이 넘도록 아버지 집을 짓고 계셔야 맞습니다(요 14:2-3). 그러나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오셨고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 20: 19-20). 또한 주님은 공식적인 재림 전이지만 지금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비밀스럽게 내주 하시면서 아버지 집이자 그분의 거처인 성전을 건축하고 계십니다(골 1:27, 요 14:2-3, 엡 2:21-22).
3.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이한규 목사는 또한 지방교회 측 성도가 “주님은 공기와 같은 그 영이 되셨는데 “오 주 예수”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호흡해 들일 때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공기와 같은 형체로 들어와서 그들의 생명공급이 된다.”라고 한 말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아담은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하).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롬 10:12-13).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요 10:10 하)이라는 말씀들에 근거합니다.
부활 후에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는 말씀은 구원론에서 핵심 진리임에도 이한규 목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이 점을 간과합니다. 단지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리처드 개핀 등 소수만이 이 구절을 귀히 여깁니다(https://www.localchurch.kr/theology/7156 참조).
죄 사함과 거듭남을 경험한 이들은 그 후에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건축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벧전 2:2, 엡 4:16). 이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그분을 접촉하고 ‘그 영을 마시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을 체험해 본 이들은 다 압니다. 위트니스 리가 “A. B. 심슨이 그리스도를 들이마시고 자아를 뿜어낸다고 찬송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들이마시고 자백함으로 내쉰다. 그분을 부름으로 들이마신다.”라고 말한 것은 체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한규 목사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폄하하지만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로마서 10장 12-13절이 말하는 그 구원을 직접 경험해 볼 것을 권합니다.
4.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회복의 시대는 끝났다”
이한규 목사는 또한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냐 종교냐>(60-61쪽)에서,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만을 주장하고 강조한다면 우리는 400년 내지 500년 정도 뒤떨어진 것이다.”라고 한 말을 꼬투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지금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소위 ‘영원 속죄’ 단계에만 머물지 말고 바울이 말한 대로 “더욱”(much more) 생명 안에서 구원을 받고 더 나아가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롬 5:10 하, 엡 4:16). 그것은 위트니스 리가 이어서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시대는 생명 되신 영이신 그리스도의 시대요 교회 생활인 그리스도의 시대이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5. 기쁜소식선교회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한규 목사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정확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정확한 구원의 복음’은 구원파 식의 “영원한 속죄와 거듭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구원 혹은 복음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하자와 한계가 있습니다.
1) 의인, 죄인 개념을 오해함: 이들은 ‘의인은 영원한 속죄로 죄가 전혀 없게 된 상태’라고 오해합니다. 따라서 위 지방교회 측 성도처럼 우리가 위치에서 본다면 의인이지만, 상태에서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말하면 불신자 취급을 합니다. 이들은 죄의 본성(sin)을 모르고, 요한일서 1장 8-9절을 불신자에게만 적용하여 성도들이 죄를 자백 못하게 함으로써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2)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생명의 성장 개념이 분명하지 못함: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승천하신 주님은 저 하늘에만 계십니다. 따라서 골로새서 1장 27절이 말하는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라는 말씀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길이 막히게 합니다.
3) 이 땅에서 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대해 무지함: 교회는 주님의 몸이자 주님의 교회입니다(마 16:18). 즉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인 유기체입니다(엡 1:23).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의 지체들을 박해하는 다소의 사울에게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행 9:4). 그런데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사실에 대한 계시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한규 목사가 위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려면, 지금처럼 남을 판단하기보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the Spirit was not yet, because Jesus had not yet been glorified)라는 말씀부터 바로 이해하여 자신의 성령론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요 7:39, https://www.localchurch.kr/truth/34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