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4일 자 크리스천투데이 인터넷판은 “붉은 암송아지 탄생은 성전 재건의 신호”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성전 연구소’가 “다른 붉은 앵거스 소의 냉동 배아를 이스라엘 국내산 소에 이식해서 이 붉은 암송아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Red Heifer)는 제3 성전 제사의 재건에 꼭 필요한 항목입니다. 랍비의 전통에 따르면, 정화수를 만드는 데 사용된 붉은 암송아지(민 19장)는 모세 이후 단지 아홉 마리만 존재했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이천 년의 공백 후에 최근에 열 번째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침에 아래와 같은 붉은 암송아지 관련 본문 말씀을 읽고 누렸습니다.
흠 없는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 … 흠 없고 한 번도 멍에를 멘 적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 그 암송아지는 그가 보는 앞에서 불태우되, … 정결한 사람이 그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결한 곳에 갖다 놓아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을 위해 보관하여 부정을 씻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민 19:2, 5, 9).
위 말씀을 여러 번 읽었지만 솔직히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참고로 읽은 아래 각주 내용은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암송아지는 부정을 씻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민 19:9) 주된 요소로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붉은색은 죄의 육체의 모양을 상징하며, … 흠 없는 암송아지는 … 그분에게는 죄의 본성이 없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암송아지가 한 번도 멍에를 멘 적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결코 누군가에게 특히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나 사탄을 위해서 이용된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민 19:2, 각주 1).
“이 장에서 부정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말한다(민 19:11, 13-16). … 반역의 죄로 말미암아(민 11-14, 16장)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죽음이 만연하게 되었다(민 16:49). 따라서 정결하게 하는 물이 필요했다. 오직 그리스도의 위엄 있으면서도 낮아진 인성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영으로(민 19:17과 각주) 이루신 구속의 일만이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것을 치료하고 정결하게 할 수 있다(9절 각주 2).
최근 들어 위와 같은 구약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면을 고려하며 묵상할 때, 제 안에 다음 두 가지가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1) 이 부정을 씻는 물이 필요했던 ‘죽음’(“시체”)은 오늘날에는 무엇인가? 2) 만일 그러한 죽음을 접한 신약 성도가 이 물을 뿌리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에 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앙망할 때 아래와 같이 죽음에 관한 말씀들이 생각났습니다.
영적인 죽음이 주변에 널려 있음: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탄 물은 특히 ‘시체’(the dead body)와 관련된 부정에 사용되었습니다(민 19:11, 13-14, 16). 그러나 오늘날에는 구약처럼 육신이 죽은 경우보다는 그것이 예표한 영적인 죽음에 이 ‘물’이 필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불신자는 물론 거듭난 신자에게도 해당합니다.
1).영적으로 죽은 불신자들의 경우: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장사 후에 따르겠다고 말한 제자를 향해, “죽은 사람이 자기네의 죽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8:22).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자 원수일뿐 아니라 심지어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요 5:25, 28, 엡 2:1, 5, 골 2:13, 히 9:14 참조).
2) 거듭난 후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인 경우: 먼저 저는 믿는 이들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상태는 과연 무엇인지를 주님 앞에서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빛 안에서 행하여 빛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서로 교통을 갖는 상태’(요일 1:7),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실제로 포도나무의 진액을 빨아들이는 상태’(요 15:4), ‘방 안에 가설된 전구에 불이 들어온 상태’ 등이 생각났습니다. 한편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롬 8:6),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10절),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13절) 같은 말씀들이 말하고 있는 ‘죽음’은 거듭난 이후에 위와 같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떨어져 나간 순간들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죄가 타락한 몸에 활기를 주어 죄를 짓게 하는 힘이라면(롬 7:19-20), 위와 같은 영적인 죽음은 정반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혹은 말씀이 우리에게 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타락한 몸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우리 주변에 심지어 우리의 옛사람 안에서 이러한 영적인 죽음 안에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음을 새삼 발견합니다!
부정을 씻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먼저 민수기 본문은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민 19:13)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표현으로 바꿔본다면, 영적 죽음을 만지고도 씻지 않은 사람은 교회를 더럽힌 것이고, 머리이신 주님 그리고 몸 안의 다른 지체들과의 교통(코이노니아)에서 끊어진 것입니다(요일 1:3).
누구든지 이런 상태가 계속 된다면, 1) 주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영적으로 메마르고, 어둠과 무기력을 느끼게 되고(요 15:5-6), 2)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누려 생명이 자랄 기회를 놓치게 되고(엡 3:8, 벧전 2:2), 3)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혹은 천년왕국에 참여함)이 거부되는 경륜적인 징계를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 25:3, 12). 오, 이 어떤 경고의 말씀인지요!
이런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탄 물로 죽음의 부정을 씻는 문제를 묵상하고 추구하면서 문득 한 자매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자매님은 매주 기도 집회로 모일 때면 늘 제일 먼저 주 예수님의 피로 씻는 기도를 하십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 기억나는 죄는 비록 안 지었을지라도 알게 모르게 죽음 즉 영적 사망을 접하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을 그 자매님은 깊이 깨닫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주 예수님, 영원히 효능 있는 보혈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가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이 정결케 하는 보혈로 죽음의 부정을 씻고
당신과 교통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