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68회 - 글자 하나 차이일 뿐인데
에세이
청지기 , 2024-01-05 , 조회수 (775)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을 많이 읽는데도 왜 이토록 변화가 더딘지를 고민해 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선입관을 가지고 읽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눈 대화를 통해서 이 점을 깊이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즉 주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그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하시자(요 11:23), 마르다는 즉시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라고 했습니다(24절). 언뜻 보면 마르다의 말에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부활  시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즉 주님은 그녀의 오빠인 나사로가 지금 부활할 을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이것을 장차 올 “마지막  부활할 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의 반응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려고 방문하신 예수님이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고 한마디 더 하셨지만, 마르다는 이 말씀에도 엉뚱하게 동문서답을 합니다. 이처럼 선입관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면(들으면) 말씀의 본래의 의미가 굴절되고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생명 공급이 차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실수입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다른 두 분과 전화로 아래 말씀을 읽고 먹으면서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팔순의 한 노부부께서 아침에 6시만 되면 어김없이 카톡 전화를 걸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 부흥 책자(큐티 집)에 소개된 한 두 구절을 차례로 읽고 이어서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두 분 중 한 분이 위 말씀 중 ‘구원을 ’을 ‘구원을 ’으로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으시도록 했는데, 그때마다 한결같이 ‘구원을 받은’으로 읽으셨습니다. 조금 느낌이 있어서, “위 말씀은 과거에 구원받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도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라고 여쭤보았습니다. 그 형제님은 우리가 과거에 받은 구원을 가리킨다고 자신 있게 말씀했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잘못 읽으신 것이 아니라 예상대로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신 것입니다(참고로 이분은 구원의 확신이 아주 분명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동사의 시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위 말씀이 과거에 받은 구원만을 가리켰다면,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말씀” 역시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말씀”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현재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되길 바라는 바울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마치 나사로를 지금 다시 살리시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는 의미로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는 시제: 전화를 끊고 Bible Hub 앱을 통해 영어 성경들을 찾아보니, 28개 모두 ‘현재’(are saved) 혹은 ‘현재 진행형’(are being saved)이고, 과거 시제로 표시한 성경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헬라어 원문도 ‘현재 완료 수동태’(4982, 소조)였습니다. <개역성경>과 <개정 개역성경> 역시  ‘구원을 얻는’으로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나?: 물론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  가는 ’ 혹은 ‘죄 사함의 칭의’ 혹은 ‘거듭남’의 구원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지금 어떤 구원을 말하는지가 궁금해서 18절 앞부분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아마도 그들이 분쟁(분열)(11-17절)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분열이 없도록)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10절)되지 못한 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원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읽은 아침 부흥 책자는 워치만 니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십자가로 제거하는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중심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목적이 아니며 신성한 목적에 도달하는 신성한 수단이다.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몸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며 안에 들어올  없다. … 우리의 자아에게서 나온 것, 우리의 기질과 조성 등은 반드시 제해져야 한다. … 만약 당신이 정말 십자가를 안다면, 이것은 당신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인도할 것이다”(워치만 니 전집, 46권, 특별집회 메시지 대화 기록(6) 91, 93, 95쪽).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으로 정의합니다(엡 1:23). 또한 그 안에는 그리스도 자신만 충만하고(골 3:11), 그리스도 이외의 요소들인 ‘헬라인, 유대인, 할례자, 무할례자, 야만인, 스구디아인, 노예, 자유인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몸의 건축을 염두에 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도 분열의 뿌리인 ‘각기 다른 생각과 의견들’을 십자가로 끝내고,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갖게 되기를 원했을 수 있습니다(고전 2:16).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체험하는 길은 아래에서 보듯이 “십자가에  박히신 그리스도 자기의 (생각감정의지안에 받아들이는 입니다.

 

어떻게 적용하는가?: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18절)과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24절)를 동일시합니다. 따라서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지금 우리 영 안에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접촉할 때, 우리는 천연적이고 복잡한 의견과 생각들은 점점 감소하고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더 확대되시는 생명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엡 3:17, 롬 5:10).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호소합니다(롬 10:13).

 

위 본문을 묵상하면서 문득 A.D. 3세기경에 어떤 무명인이 작사했다는 이런 찬송 시가 떠올랐습니다(“Though Christ a thousand times”). “베들레헴에 주님 태어나셨지만 주 네 안에 나셔야 내 혼 구원되리. 골고다의 십자가    구하리  안의 십자가만  온전케 하리(1). 네가 사랑하는 것 그것이 네가 돼. 주 사랑하려느냐 흙 사랑하려느냐. 주 채우면 주 되고 흙 채우면 흙 돼. 네 자신 비울 때에 주 만유 채우리(2). …  맘에 받아들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네 자아에 대하여 죽고 주 대하여 살도록(후렴)(366).

 

 

오 주 예수님,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들입니다.

당신 자신으로만 충만한 당신의 몸을 속히 얻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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