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대한 선호는 여러 이유에 근거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 자주 먹던 것이 지금도 좋습니다. 예를 들면, 콩비지 찌개(어릴 때는 ‘되탕’이라고 불렀음), 청포묵, 인절미, 김치만두, 순두부 이런 것들입니다. 냉면이나 물만두나 샌드위치는 결혼 후에 집사람 때문에 그나마 먹게 되었습니다. 처음 냉면을 먹었을 때엔 고무줄 씹는 것처럼 낯설었습니다. 자꾸 먹다 보니 지금은 그런대로 먹을 만합니다. 샌드위치는 정말 제 사전에는 없던 메뉴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딸아이 픽업 시간과 맞아서 한 동안 샌드위치 가게를 다닐 때, 가끔 집에 가져오던 것을 먹으면서 제 관념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싶을 때는 가끔 샌드위치점인 서브웨이에 들릅니다.
한편 성경도 일종의 영적인 먹을 거리입니다(마 4:4, 렘 15:16, 벧전 2:2). 그런데 음식인 말씀을 먹을 때도 선호가 있음을 봅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랑 혹은 자기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들에는 호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뭔가 부담스러운 본문에는 아예 귀를 닫거나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딤후 4:3). 아침에 읽고 묵상한 아래 말씀은 이런 현상에 대해 ‘젖’을 먹는 영적인 ‘갓난아기’(infant)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마다 … 갓난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충분히 성장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훈련받은 감각 기능을 사용하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합니다(히 5:13-14).
사실은 한 주 내내 위 본문을 묵상하고 또 추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저자가 위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를 쓰게 된 부담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출신의 신약교회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 머물지 말고, (생명의) “성숙에 이르도록 전진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히 6:1).
“훈련받은 감각기능을 사용하여 좋고 나쁜 것을 분별”: 관련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성숙에 이르려면, 우리의 ‘훈련된 감각기능’을 사용하여 무엇이 더 뛰어난 것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저자의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천사(히브리서 1-2장), 모세(3장), 아론(4-7장) 보다 뛰어나시고,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뛰어나니(8-10장), 이러한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여(11-12장), 그분을 살고 표현하는 교회생활을 계속하고(13장),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회복역 관련 각주는 위 ‘좋고 나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좋고 나쁜 것’은 열등한 것과 뛰어난 것의 대조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뛰어나신 것은 천사와 모세와 아론이 열등한 것과 대조가 된다는 것을 말하며, 또는 새 언약이 뛰어난 것은 옛 언약이 열등한 것과 대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절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에 언급된 분별은 서로 다른 음식을 구별하는 것과 비슷하며, 도덕성이 어떠한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14절 각주 2).
참고로 빈센트도 관련 주석에서 위의 ‘좋고 나쁜 것’이 도덕성의 문제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Not moral good and evil, but wholesome and corrupt doctrine”, Word Studies p.440).
“단단한 음식”: 위 저자의 논리에 의하면, 율법 준수 같은 구약의 가르침을 강조하거나, 신약도 사복음서만 주로 가르치면, 거듭났어도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만 먹는 ‘갓난아이’ 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그 단계에서 더 전진하여 서신서와 계시록도 먹으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과 그분이 우리의 영에서 혼으로 마침내 우리의 죽을 몸에까지 확대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말한 새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히 8:10).
그러므로 위 본문의 ‘단단한 음식’은 이러한 생명을 분배하여 성숙으로 이끄는 데 방해가 되는 우리의 타고난 혼(생각, 감정, 의지)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 즉 “의의 말씀들”을 가리킵니다(히 5:13).
이러한 ‘의의 말씀’의 대표적인 예가 열 처녀의 비유(마 25장)입니다. 대부분은 여기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불신자라고 해석합니다. 예전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당 본문을 읽다가 “어리석은 처녀들”이 “우리의 등불이 꺼져가니(our lamps are going out)”(8절)라고 말한 부분에 이르렀을 때, 이들도 영 안에는 기름이 있는 거듭난 사람들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릇(혼)에 여분의 기름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이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10절). 어떤 이들은 또 이 대목을 오해하여 거듭나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잘못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곳에서 이런 부류에 대해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받지만, 불을 통과하여 받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3:15). 따라서 의의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잘 분별하며 꼼꼼히 읽어야 빗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런 의의 말씀을 대할 때 참으로 깨임이 있습니다. 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아멘” 하며 받아 생명의 성숙에 이르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오 주님,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게 하시고,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왜곡하여 읽지 않도록 도우소서! 모든 말씀을 “아멘” 하며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