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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8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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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만 사천(14만4천)을 마치며....
결여된 인격을 돌이켜 가슴깊이 회개하며 모든 형제들의 전에 글을 올립니다.
“나의 부끄러운 인격을 십자가의 수치로 가려주시고 나를 항상 거스르고 대적하는 의문의 증서를 당신의 보혈로 덮어 도말하신 주! 예 수 여!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찬양하오며 입술의 증거를 주님의 몸 된 형제(교회)들 앞에 선포합니다.”
저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면 14만4천을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가 순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농간하는 자들이 부끄럼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이들이 아직은 14만4천이 아님을 자각한다면 더욱더 겸손해 질것이요 또 바른 간증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아버지 앞에 다소라도 득죄를 면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계시록에는 미지수의 흰무리가 있는가하면, 더도 들도 아닌 14만4천이라는 정수의 무리가 있습니다. 흰무리는 큰 환란에서 나오며 숫총각(어린양)이신 예수의 피로 그 옷을 씻어 정결한자로 밝혀주시어서 해석을 요하지 않았으나 14만4천의 복음은 지금까지 많은 수난을 받고 있습니다.
14만4천의출처는,
ㅡ 홑 교단이 아니라 12지파로써 반만년이 넘어 헤아릴 수 없는 인원을 바탕으로래야 되며 이마에는 주님의 성호가 각인 돼야만합니다.
제가 계시록을 상고하던 가운데 13장 끝부분에서 짐승에게 살육당한 자가 나오고 다음으로 14장에서는 십사만사천이 등장하여 이마를 보여주시고, 13절속에는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 때문에 번민이 뇌로 가득하고 정리가 되질 않았었습니다. 그런 후에 첫 열매들의 행방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어린양이 입에 거짓이 없는 이들을 어디로 인도하셨을까, 어린양이 이들 14만4천을 궁궐 같고 대궐 같은 건물에 돈방석 같은 제단으로 이끄셨을까? 아닙니다.
십자가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배 처소는, 바람으로 벽을 삼고 하늘로 지붕삼아 복음의 제단위에 관유를 몸에 붓고 말씀의 검으로 각을 뜬 후 성령의 불로 온전한 번제를 들인 자들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불]은 문학상 표현입니다. 저는, 산기도중에 불을 가슴에 받아 뜨겁다느니, 발이 뜨거워 펄쩍 펄쩍 뛰는 부류와는 거리가 먼 자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믿음의 선진(히11장)들을 생각하며 머~언 발치서나마 그들의 발자국에 엎드려 입술을 살포시 포개봅니다.
ㅡ 살육(순교) 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14만4천의 수 가 다 찼을까? 하는 고심 중에 있을 이때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계시록 6장 9절로 11절까지를 열림을 받아,
ㅡ 죽음 (살육)의 때가 아직 차지 않음,
을 깨닫고 죽음의 수의 반열에 받아주시기를 기도 중에 있으며 또 그렇게 전해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죽음(순교)의 수에 있어서는 얼핏 계산이 떠오르며 그리고 입이 버러질 만큼이나 천주교가 박해한 숫자가 머리를 온통 뒤덮어 버릴 것입니다.
천주교도들이 박해한 숫자와 계시록140000의 수는 비교가 되지 않아 천주교도들이 죽인 숫자로 영안을 가려버려 14만4천이 풀리질 않았나 봅니다.
한편,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음을 당했을까? 그들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 존전에 합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딱히 구분되어 떠오르지 않았더라도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제라도 우리하나님아버지와 그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망하시는 순교의 방향이 무엇인지 잠시나마 심사숙고하시면 본문의 말씀이 더욱더 가슴깊이 각인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갈망은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며 혼돈한 복음의 종착역이 되고 주님의 품에 깊숙이 묻히시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 비밀한 답은, 반석이요, 열쇠요, 성경의 모든 것 되시며 진주입니다.
단, 바리새인들에게와 돼지와 개들에게는 맛도 없고 감각도 없고 또한 분깃도 없으리라.
요즘 성도들의 입술에 “이기는 자들” 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르내리며 또한 듣는 이들로 하여금 낯설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겨야하는 푯대가 “생활가운데” 서 라고 합니다.
또한 “이기는 자는 환란 전에 휴거”된다고 서슴없이 말을 해왔습니다.
물론, 생활가운데서 이기고 더 나아가 세상을 이겨야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면 이쯤은 기본이 아닐까요?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쯤은 동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대 할 때면 무엇인지 석연함이 깨끗이 가시지 않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첫째로 이기는 강도의 단계가 어느 정도인지가 불분명 했었으며 이기는 대상이 미심쩍었읍니다.
여기!
안내해 드리는 구절 말씀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순도 높은 선조들을 2등으로 밀쳐내고 자아처리 적(기본, 필수) 이김을 선포함으로 선조들의 흔적을 흐려놓았습니다.
부르지저는, 윗 구절을 이렇게 읽(삶)습니다.
*****특정한 성직이 아닌[형제]의 일원으로서, [예수의피]를, 일찍이 가인에게 선포하여 경계해주신 죄가 출입하는 마음의 문, 죽음이 출입하는 문, ,.... 이 문 설주에 세로로 바르고 인방에다 가로로 발라 죄를 차단하고 죽음을 유월시킨 후에 , 십자가의 형상이 아닌 “十字架의 道”를 손에 들고나가, 일자 기둥을 붙잡고 봉사라는 미명아래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자같이 눈감고 나오는 봉사들에게 우리에겐 구원의 피요 저들에겐 저주의피로 맞서 싸우며, 또 예수의 이름의 비밀을 간증하고 그리고 부르짖어 “주! 예수여!” 부르며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로 열매”를 드렸으나, 이름을 부를 때면 각 파가 하나로 뭉쳐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선조들처럼 피를 흘리는 지경과 더 나아가 생명까지는, 아직은 아닙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바울과 게 바. 요한. 등 사도들은 무엇을 위하여 생명을 버렸을까?
여기 그 신앙의 금자탑이요 지금까지 아껴온 진주를 소개 합니다.
깊은 기도 가운데서 아래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행15;26)* 아멘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아멘입니다.
그렇습니다. 침례가아니라 이름을 위하여, 안식일이 아니라 이름을... 이외에 그 무엇이 있을지라도 오직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서 보장도 없는 짐들을 벗어버리고 분별력을 발휘하여 지름길로 들어서기 바라며, 언제까지 남의 젖이나 의지하지 말고 이제는 목사님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선생으로 처녀로 장성하자
이제 그 이름을 위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상급을 말씀으로 사경해 보겠습니다.
*(마19;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아멘입니다.
여호와 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이며 여호와의 왕국이 아니고, 사랑의 아들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과 처자와 소유를 버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자.
요즈음, 주 예수의 이름이 빠진 죄 사함, 주의이름이 빠진 생명, 주의이름이 빠진 인침, 주의이름이 빠진 자녀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의 이름부름의 명령을 실행하는 자들을 조롱하고 이단이라 하겠습니까.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말하기를 “주! 예 수 여~!, 나의 영을 받아주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는 이 말을 하고 잠 드니라.*(킹 제임스 번역 행7;59)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 혹시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실행자들을 이해를 못해서 비방 조롱하신 적이 행여 있으면, 이제 주저 없이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여!,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ㅡ 오! 주, 예 수 여! 주님을 사랑합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