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9-16 , 조회수
(278) , 추천
(0) , 스크랩
(0)
외적부분이 부족함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허위와 거짓이 싹트고
얼마나 많은 거짓생명이 소위 하나님의 전(?)이라는 곳에서 참생명을 가장 하는 지... 물질적인 집회장소인 예배당에는 오는 이라면
그가 누구든 반기며 그의 장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는 아랑 곳 없이 아주 일방적인 단 몇마디의 말로 그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배당이라는 곳에 다닌 적이 있으면 그는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마는 것은 허다한 많은 교파는 말할 것 없고 생명을 중요시 하는 회복 또한 차이가 없다. 오히려 제도권 밖의 몇몇 교단은 성숙은 없지만 출생이 분명한 곳들이 있다.
출생과 성장 어느 것이 중요한 지 출생이 없으면 유감스럽지만 성장이 없다(있다고 생각하면 생각 되어지는 이는 조화(artificial flower)일 것이다) 출생이 있다면 그는 분명 그 분의 자녀이다.
출생이 없는 이는 유감스럽지만 아무리 뛰어난 진리를 말할지라도 가장에 불과한 것으로 불못을 짝하는 자에 지나지 못한다.
침례가 먼저인가? 거듭남이 먼저인가? 후자없는 전자가 생명을 강조하는 곳에서 자행되니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중고등부나 어린이 집회에(때론 복음집회 때론 일반집회)참석한 이는 누구에게나 100% 침례가 진행된다. 무슨 공산주의나 전제주의처럼.... 세상의 어떠한 시험도 100%가 있을 수 없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결정에 ... 복음의 은사가 있는 무디, 스펄젼, 로반 이버츠, 워치만 니등에게서도 그들 집회 참여자 중 소수만 거듭나고 소수만 침례 받았다. 오늘 날은 어떠한 시대인가 좀처럼 복음이 들어 가지 않는 때이다 교회의 인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거짓 자녀가 있어서는 안된다. 눈물은 고사하고 죄에 대한 각성도 없고 집사실이나 장로실로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하여야 구원받는가 하고 애통하며 찾는 이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봉사자와 전도하는 이의 출생과정이 죄의 각성과 무관하고 영접구원에 따른 태생적 한계인지 실로 답답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