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주님 안에 갇힌 사람인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엡 4:1). 바울은 이 말을 에베소에 있는 교회, 즉 그 지역의 모든 거듭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거듭난 우리가 모두 부름(소명)을 받은 사람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1:9, 롬 8:28, 고전 1:2, 골 3:15, 히 3:1). (따라서 ‘소명’ 혹은 ‘콜링’ 받은 것은 신학교 가서 사역자가 되거나 외국으로 선교 나가는 것이라는 일부의 관념은 조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행하라고 요청한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1) 하나를 힘써 지키고(엡 4:3), 2)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며(엡 4:15), 3)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라(엡 4:20-21)고 권합니다.
며칠 전 아침에 아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위 셋 중 첫 번째 항목인 <하나를 지키는 문제>가 더 진지하게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오(엡 4:3)
사실은 예전에도 이 말씀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위 본문에서의 ‘그 영의 하나’(the oneness of the Spirit)는 그 영 자신을 가리키고, 또한 이 하나는 ‘한 인격’(one Person) 자체라는 점이 선명하게 이해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지킨다는 것도 마치 사무실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전구가 그 안에 흐르는 전기에 연결되어 불이 켜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이 생각을 (하나 자체이신) 그 영에 두는 것(롬 8:6)임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러한 하나를 힘써 지키라(Being diligent to keep)는 말을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며칠을 두고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갈 때, 최근에 경험했거나 읽었던 아래 내용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가 가능한가?: 주님은 지상 사역 마지막까지도 믿는 이들의 하나를 위해 “거룩하신 아버지, …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요 17:11, 21-23). 그러나 약 4만 개의 교단으로 분열된 처참한 현실은 많은 이들에게 이 몸의 하나(엡 4:4)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위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와는 다른 종류의 하나(에큐메니컬 운동)를 추구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이 하나 되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또 평생 몸소 그 길을 갔던 두 성경 교사에게 배운 사람으로서, 이 주제에 대한 저의 현재 모습을 아래 세 가지 방면에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판정하시게 함: 하나의 실재는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신 그 영이시지만, 가끔은 우리의 혼(특히 생각)은 이러한 영과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때 나의 의견과 관념을 부인하고 즉시 그 영께로 돌이켜 그분과 하나 되고, 또 다른 지체들과도 하나 되기를 더 절대적으로 실행할 필요를 느낍니다(골 3:13, 15).
소위 지방 입장 문제(1) - 오해를 해소함: 며칠 전에 선교단체에서 리더로 있다가 교회에 들어오고, 전 시간 훈련 후 현재 캠퍼스에서 봉사하고 있는 한 형제와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목사님 아들인 선교 단체 후배 하나가 잊을 만하면 전화해서 <지방 입장>에 대해 비판하는데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여러 말을 해주었지만, 저의 대답의 핵심은 소위 ‘지방 입장’(local ground)을 ‘한 지방에는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하는데, 첫째는 모든 믿는 이는 하나 되어야 한다는 점(요 17:21)에 동의하는지 여부, 둘째는 그 하나는 우리 안에 오신 그 영 자신(엡 4:3)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한 지방에 한 교회>는 이러한 하나의 본질이신 그 영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충만되시기까지는 시간이 걸림으로 그 기간 동안 분열적인 자아를 제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만일 이러한 ‘거주 지방 단위’ 외에, ‘교회’(마 16:18)를 ‘교회들’(마 18:17, 계 1:11)로 나누는 성경이 말하는 더 좋은 기준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가보라는 말로 조언을 마쳤습니다.
사실 워치만 니는 몸의 하나를 유지하는 길로 <지방 입장>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를 나누는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그 개념 이해에 부족이 있거나 우리의 태도와 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위 지방 입장 문제(2) - 우리의 태도와 영을 돌아봄: 최근에 위트니스 리 전집을 읽는 중에 아래 내용을 보고, 최소한 워치만 니(Nee)와 위트니스 리(Lee)는 다른 믿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매우 유연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분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우리(We)들의 태도와 영이 과연 합당한지 여부입니다.
“우리는 교파들과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그 안의 많은 참된 믿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서도 안 된다. …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분열과 타협해서도 안 되고, …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우리의 형제들로 인정하고 또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대자들을 대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참된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 중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회복을 잘못 대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우리는 참된 교회 생활을 실행하고 있고 그들은 안 하고 있다고 선포할 필요가 없다. …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우리의 영과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옳은 어떤 것을 하되, 그것을 잘못된 영으로 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상황들을 합당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회복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if we do not face such situation properly, we may be missing the nature of the Lord’s recovery). … 우리는 심각한 죄나 이단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한 교회 안에서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회복의 이상을 보았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위트니스 리 전집(영문판), 1978, 제1권, pp. 535-53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본 소위 주님의 회복은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긍휼로 다른 믿는 이들보다 조금 더 본 것이 있다면, 다만 그 길을 잠잠히 가고, 그 길을 가지 않는 이들에게도 늘 열려서 교제를 추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정죄의 영과 태도를 갖지 않을 때 몸의 하나는 보다 더 강화될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몸의 하나를 지키고, 영적 생명이 자라서,
당신에게 배운 대로 이 땅에 사는 무리들을 더 얻어 주옵소서!
우리가 이 일에서 좋은 본으로 발견되도록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