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59회 - 중보기도
에세이
청지기 , 2023-11-03 , 조회수 (754) , 추천 (0) , 스크랩 (0)


지난주 내내 ‘중보 기도’라는 단어에 대해 묵상하고 또 추구했습니다. 먼저는 성경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고 관련 말씀을 통해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있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단어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들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중보 기도>는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흔히 이 단어로 표현되었던 <남을 위한 기도>의 경우에는 ‘중보 기도’라는 말 대신에 ‘도고(禱告)’, ‘합심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등 다른 표현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누군가가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았다는 식의 소위 신사도 운동 쪽의 실행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정서가 있는 것도 관찰됩니다.

 

그런데 아래 히브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가 관심했던 부분은, 이런 논점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어떤 내용으로 중보 기도하시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 밖의 여러 관련 구절들까지 찾아서 읽고 묵상할 때 이 주제가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히7:25).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님: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하고(딤전2:5), 또 다른 곳에서도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말씀합니다(롬8:34). 따라서 성경에서 ‘중보자’ 혹은 ‘중보 기도’라고 할 때, 그 주인공은 일차적으로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며, 피조물 중 그 누구도 그분의 이러한 독특한 지위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내용: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내용으로  ‘중보 기도’하시는지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는 은밀하게 드려지는 그분의 중보 기도 내용을 다 알 수 없으며, 그분만 아시는 비밀한 영역이긴 합니다. 그러나 관련 구절들을 깊이 묵상해 볼 때, 아래에서 보듯이 그분의 중보 기도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 느껴졌습니다.

 

1) 아침에 위 말씀(히 7: 25)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할 때, 그분의 중보 기도 내용은 ‘우리를 철저히 구원하는 것’과 연관이 깊다는 점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즉 이 말씀은 ‘불신자의 구원’ 혹은 ‘법정 선언적 칭의의 구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구원 즉 우리의 ‘온전한’(판텔레스, 3838구원을 위해 그분은 지금 이 시각에도 중보 기도하고 계심을 함축합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은 구원에 관해 말하면서 이미 화목케 된 이들이 더욱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것”을 말합니다(롬5:10하). 오 우리는 얼마나 철저한 구원이 더 필요한지요!

 

2) 주님의 중보 기도의 내용에 대한 관심은 다음 말씀들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더 뛰어난  직무를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더 좋은 약속들을 근거로 제정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히 8:6). “이러므로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 부름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히 9:15).

 

위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새 언약의 내용들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성취되게 하시는 것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을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합니다. 참고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새 언약의 내용은 1) 그분의 법들을 우리의 생각 안에 넣어 주고(impart, 혹은 put into), 우리의 마음에 안에 새기는 것(inscribe), 2) 그분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 3)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4) 우리의 불의를 용서하고 죄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히8:10-12).

 

과거의 체험을 돌아볼 때,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리려는 마음이 많았고, 그분의 생명의 영의 법(롬8:2)이 우리 존재 안에 넣어지고 새겨지는 관념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위 새언약의 성취와는 무관한 엉뚱한 일(소위 ‘주의 일’)에 몰두해 있는 경우가 생깁니다.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고 자신의 힘과 노력이 거의 소진되었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도대체 주님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느냐?’고 그분께 묻게 됩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네가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하기를 원치 않고, 나의 법을 너의 속 부분(the inward part)에 넣어주고 새기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이것이 참된 신앙의 성숙이고, 더 철저한 구원이며, 이렇게 된 장면 뒤에는 그분의 중보 기도가 있으셨다고 믿습니다.

 

3) 로마서 8장 27절은 “그영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을 따라’ 하시는 것이며, 임의로 아무것이나 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4)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어지는 28-29절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 뜻은 그분의 뜻대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환경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많은 아들들이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신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열심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은 물론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얻고 더 풍성히 얻기를 추구했습니다(빌3:5-8). 이 역시 비밀스러운 그분의 중보 기도의 결과라고 믿습니다(롬8:27, 34).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주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부름 받은 우리를 철저히 구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 께로 돌이켜지고, 죄 사함과 거듭남을 체험하고, 이런저런 고난의 환경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존재에서 옛 것이 비워지고 그 자리에 신성한 생명(의 법)이 채워져 마침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많은 아들들이 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하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1절의 중보 기도(도고): 이 말씀에서 개역 성경이 ‘도고’(禱告)라고 번역한 원어는 ‘엔튝시스’(1783)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것을 Intercess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중보 기도란 용어, 교회에서 사용해도 문제없다>(구요한 목사님)라는 글이 참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참된 기도는 우리에게 계시되고 전달 된 주님의 부담을 따라 반향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보 기도하시는 그분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합해질 수 있다면 최상의 ‘도고’가 될 것입니다.

 

 

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
우리의 철저한 구원을 위해 지금도 중보 기도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당신의 기도에 합당하게 반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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