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버림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지 사람이 사람을 ‘버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물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그런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표현입니다. 아침에 구약 열왕기상 14장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말씀을 대한 후에, 계속 이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어 더는 읽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14:9).
위 말씀은 여호와께서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하신 것입니다. 위 본문에 따르면, 여로보암이 다른 신들과 우상들을 부어 만든 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자신을 등 뒤로 버린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여로보암의 악행은 좀 더 자세히 본다면, 1)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둔 것,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 삼은 것, 3) 별도의 절기를 제정한 것, 4) 제사장이 아님에도 임의로 단에 올라가 분향한 것 등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주님 앞에서 깊이 묵상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또 다른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2장1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라고 하셨고, 계속해서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일반적으로 ‘버린다’는 말은 강자가 약자에게, 또는 권한 있는 자가 그 권한에 종속되는 자에게 쓸 수 있는 말입니다.예를 들어, 미혼모는 약자이지만 그녀에게 태어난 갓난아기는 더 약한 자임으로 그녀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아기를 본인이 직접 키우지 못하고 입양기관에 맡길 때, 그 아이는 어떤 의미에서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대신에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출3:14, 요8:24).
따라서 그분은 자기를 버린 피조물에게 모든 조처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는 즉시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즉 여로보암이 선지자에게 아내를 보내어 소생 가능성 유무를 물었던 아들인 아비야는 즉시 죽었고,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새로 왕이 된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습니다”(왕상 15:29).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공의의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부득이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즉시로 돌이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위 예레미야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의 근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사건은 아래 인용 본문을 포함한 전후 문맥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느껴집니다. 마치 철없는 여자가 한 남자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렸지만, 그래도 그녀를 용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한 남자의 사랑이 느껴지는 문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
위 말씀 중에서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는 여호와의 말씀은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 책 <라이프 스타디> 해당 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아내와도 같은 이스라엘의 간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녀가 그분께로 돌아온다면 여호와는 그녀에게 다시 돌이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호와의 자비요, 그분의 자비는 무궁하시며 아침마다 새롭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가는 그녀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하나님은 그분을 버린 사람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에서 그들의 마음이 돌이켜져서 다시 그분만을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그분은 한 면으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절대적인 초월자이시지만(딤6:16), 또 다른 면에서 그분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과 깊이 연합되기를 갈망하십니다. 이 두 방면을 균형 있게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분을 헛되이 경배하거나 반대로 그분을 쉽게 버리고 “다른 남자”와 연애하러 찾아 나섭니다(호 2:5-7).
구약뿐 아니라 심지어 지금도 원칙상 같은 일들이 저를 포함한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 깊은 곳이 아려오려고 합니다.
오 주님, 사람은 얼마나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자기 소견을 따라 임의로 행하는지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버리는 일이 어찌 가능한가요.
오 주 예수님,
이 아침에 생수의 근원이신 당신께 다시 돌이킵니다. 당신을 생수로 마십니다.
오 주 예수님,
이 시간 우리 안에서 당신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심판하여 주옵소서!
주님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게 하는 모든 이물질이 철저히 제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기 원합니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당신 한 분만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