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성경 읽는 진도를 따라 누가복음 11장을 읽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아래 구절을 묵상하면서 ‘바리새인’과 ‘예수님’이라는 두 단어가 입체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즉 바리새인은 옛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신 새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최근 들어 계속 ‘한새사람’(엡 2:15)에 관해 누리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청하니,
예수님께서 들어가시어 상에 앉으셨다.
예수님께서 식사하시기 전에 먼저 씻지 않으신 것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자(눅 11:37-38).
전후 사정을 모른 채 상식적인 눈으로 위 말씀을 읽으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배경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게 되면 왜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추구를 통해 알게 된 내용과 그 과정에서 빛 비춤 받은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 식사: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점심’으로, 킹제임스 쪽 번역들은 그냥 ‘식사’ 혹은 ‘음식’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인 ‘아리스타오’(709)는 헬라어 사전에서 ‘조반을 먹다’로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개역 성경은 같은 단어가 쓰인 요한복음 21장 12, 15절을 ‘조반을 먹다’라고 바로 번역했습니다. 성경 용어인 헬라어 전문가인 빈센트는 이 단어에 대해 ‘회당에서 아침 기도하고 돌아온 즉시 먹는 아침 식사’(The morning meal, immediately after the return from morning prayers in the synagogue)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 구절 이후에서부터 바리새인들을 향해 쏟아내신 책망의 말씀들은 아침 식사 초대 한 사람과 나눈 대화치고는 다소 거칠어 보일 수 있습니다(39-52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왜 이 땅에 오셨으며,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경륜 성취에 어떤 걸림돌이 되었는지를 알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식사하시기 전에 먼저 씻지 않으신 것: 이것은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소위 위생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식사하기 전에 손을 팔꿈치까지 씻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전통”(마 15:2, 막 7:2-5)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참고로 ‘(손을) 씻다’의 원문은 ‘밥티조’(907)로 침례와 같은 말입니다.
복음서에는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충돌한 사례가 여러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마 15:1-9, 23:1-39; 막 7:1-23). 특히 아래에서 보듯이 식사 자리에서 은근히 갈등을 보인 사례가 이 외에도 두 번이나 더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식사하자고 예수님께 청하니,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시어 상에 앉으셨다 ….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신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인이 누구이며, 어떤 여인인지를 알았을 터인데! 이 여인은 죄인이 아닌가!’”(눅 7:36, 39)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실 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막 3:2 참조) 지켜보고 있었다”(눅 14:1).
바리새인: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의 숫자는 약 6000명이었답니다. 이들은 로마제국 등 이민족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고,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실행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절제된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손을 닦고 말씀을 읽고 정결한 음식만을 먹으며 이방인을 만나지 않고 십일조를 내고 금식을 하며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들은 성경공부에 열심이고, 말씀 중심으로 살고자 하고, 자기 절제가 있고,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목숨을 건 애국자들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선입관과는 달리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존경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지금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여러분의 속은 탈취와 사악으로 가득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39-40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드러나지 않은 무덤”(44절) 같다는 등 그들이 “크게 앙심을 품을”(53절) 만큼 더 가혹합니다.
예수님: 원래 영어 ‘Jesus’는 여호와의 ‘Je’와 구원(혹은 구원자)을 가리키는 ’Sus’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구원 혹은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보통은 구원을 죄사함 혹은 거듭남으로 알고 있지만, 바울의 서신에 따르면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 혹은 한 새사람이 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롬 1:2-3, 15, 16:25, 12:2, 갈 4:4-5, 골 3:10-11). 따라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님 자신으로 충만하게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격 삼아 살게 하는 일을 하시려는 그분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의 의가 강하면서 눈 먼 사람들입니다. 다소의 사울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 그분의 경륜 성취를 위하여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아침에 위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옛사람은 무익하며 죽고 장사지내기만 알맞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 핏속에는 여전히 바리새인의 기질과 요소가 녹아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말씀대로 살고 싶고, 원칙에 충실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이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볼 때 즉시 정죄가 나오고, 많은 때 저의 모습은 새사람의 모습인 아래 말씀과는 많은 간격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옛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골 3:9-10).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된 것을 벗어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십시오. … 우리가 서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엡 4:24-25).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이니, 불쌍히 여기는마음과 인자(kindness)와 겸허와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으로 입으십시오”(골 3:10, 12).
위 두 곳의 말씀은 주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거나 친절과 온유함 등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흉내 내는 것조차도 버거운 특성들입니다. 우리가 둘 중 어떤 본을 마음에 두는가에 따라 우리의 장래 모습도 그렇게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 주님, 이 아침에 바리새인과 주님 자신을 계시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모두 당신을 닮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