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55회 - 빌라델비아 교회-“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
에세이
청지기 , 2023-10-06 , 조회수 (887) , 추천 (0) , 스크랩 (0)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가장 인상적인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아마도 최고의 지역 교회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어떤 점이 그토록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였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 이름이 헬라어로 <형제 사랑>이므로 그들의 형제 사랑을 장점으로 꼽기도 합니다. 아침에 관련 본문인 계시록 3장 7-13절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면서, 저는 주님께서 그들이 행했다고 직접 언급하신 내용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크게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8절). 주님은 이에 대하여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어 보상하셨습니다. 두 번째가 바로 아래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기 때문에, 나도 너를 지켜 주어,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온 땅에 닥쳐올 시련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계 3:10).

 

 

사실은 이 구절의 바른 의미를 깨달아 알려고 며칠 동안 이 말씀을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인내의 말을 지킨 것과 장차 온 땅에 닥쳐올 “시련의 때”(대환란)를 피하게 해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환란에 관해, 어떤 이들은 모든 믿는 이들이 대환란 전에 휴거된다고 하고, 또는 정반대로 모두가 대환란을 통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위 본문은 두 관점과는 조금 다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조건을 충족시켰을 경우, 대환란을 피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과연 위 말씀의 빛에 비춰볼 때 현재 어떠한 상태이며, 앞으로는 어떠할 것인가를 주님 앞에서 고려하면서 이 말씀이 제게 더 진지하고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주님은 여기 10절에서는 앞의 8절과 달리,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 주님, 여기서 말하는 인내의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하고 주님을 앙망하는 중에, 그 앞에 ‘나의(My)’라는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인내의 말”은 무엇이며, “지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오 주님, 제게 계시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와 추구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는 관련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내의 말씀은 곧 주님의 고난의 말씀이다. 오늘날 주님은 여전히 인내하시며 거절과 박해를 견디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내에도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다(계 1:9).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 그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서 당하신 거절과 박해를 견뎌야 한다(각주1).

 

 

본문 묵상과 참고자료 그리고 관련 구절들을 고려해 볼 때, 제 안에 다음 두 가지가 정리가 되었습니다.

 

첫째,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모든 환경을 우리와 함께 통과하고 계십니다(갈2:20).

 

돌이켜보면, 주님은 지상 사역 시 유대 종교인들과 로마 정치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거절과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심지어 부활하신 후에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면서도 그분은 여전히 박해받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베일에 덮혀 있었지만(골 1:27), 그분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등을 박해하던 사울과의, “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행 9:5)라는 대화 시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울은 자신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을 뿐, 하늘에 있는 누군가를 건드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와 같은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주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이 위대한 한 사람-놀라운 ‘나’-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에 세 번 기록된 이러한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은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인 그리스도와 교회(엡 5:32)에 관해 바울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 육체에 채웁니다”(골 1:24)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 인내에 참여한 사람”(fellow partaker … endurance in Jesus)(계 1:9)이라고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겪는 인내해야 할 모든 환경은 우리 안에 지금 내주하시며 인내하시는 주님과 함께 통과하는 (우리가 그분의 인내에 참여하는) 것임을 보고, 큰 격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빌라델비아 교회(혹은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가 대환란을 피하게 된 것은 그들이 인내해야 하는 환경과 시간을 영적인 첫 열매로 익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롬8:28-29).

 

요한계시록 14장은, “첫 열매로 드려진 사람들”이 대환란 기간(9-20절) 이전에 어린양께서 서 계신 시온 산에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 4절). 사실 추후 있게 될 대환란뿐 아니라 현재 믿는 이들이 겪는 모든 환경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선민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휘오데시아(5206)-이 되는 것입니다(엡 1:5).

 

그러므로 지금 교회 시대를 사는 동안 닥쳐오는 모든 인내해야만 하는 환경 앞에서 우리는 원망하거나 스스로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우리 안의 옛사람의 요소를 감소시키고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 존재 안에 더 깊이 더해지심으로(요 10:10 하),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빛이 있습니다.

 

오!, 우리는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대항해 맞서셨던 것같이 고난을 참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인내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이 아래와 같이 기도한 것이 이 글 주제와 관련해서 더 공감이 가고, 참으로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이르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로 인내하는데 이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the Lord direct your hearts … into the endurance of Christ)”

(살후 3:5).

 

오 주님, 참으로 그리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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