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각 사람의 인생관 혹은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붙들고 매우 오랫동안 씨름했습니다. 처음에 내렸던 잠정 결론은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타적인 삶 혹은 자기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에는 ‘무엇을 위해서?’ 부분이 다소 모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속성들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저의 최종 목표가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진리들을 열심히 추구했고, 성경 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한 예로,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먼저 추구’하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알아서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마 6:33). 이런 방향 설정은 가정과 회사보다는 교회 일이 우선이고, 교회를 위해 드려지는 시간들은 하나님이 다 계수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물론 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저의 ‘종교적인 열심’으로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오해했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위 말씀의 본질이 저의 평범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련하여 최근에는 아래 말씀이 제게 레마처럼 임했습니다.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권고로 양육하십시오(엡 6:4).
위 본문은 “신부인 교회”에 관한 부분(엡 5:22-33)과 “전투원인 교회”에 관한 부분(엡 6:10-20)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관련 각주는 이러한 본문의 배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 그리고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다루는 6장 1절부터 9절까지 … 다루어진 요점들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신부나 합당한 전투원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 절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공과가 되는 한 가지 요점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가 이 시대에서 합당한 인간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6:1, 각주 1).
최근 들어 주님은 저의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현재 상태를 진지하게 재고해 보도록 몇 가지 환경을 예비해 오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저의 영만이 아니라 혼까지도 주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서, 그분이 표현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무거운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을 위해 저의 생각이 새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특히 저의 감정까지도 소위 재조성 되어야 함을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라는 말씀을 저의 가족들과의 관계에 적용해 볼 때, 큰 부족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는 발달되어 있는지 몰라도,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고, 공감하고, 격려하는 부분은 너무나 결핍되어 왔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는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작 아내나 하나뿐인 딸에게는 소홀히 하고 심지어 무관심했다는 지적을 깊은 속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묵상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성전세와 관련해서 베드로를 배려하셨던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즉 ‘그대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베드로가 ‘내십니다’라고 성급히 말해버린 상황을 마무리하신 부분입니다. 주님은 왜 자신은 성전세가 면제되는지를 설명하신 후, 이렇게 추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되니, 그대는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입을 벌리면, 은화 한 닢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그대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십시오”(마 17:27).
위의 사례에 비춰볼 때, 저는 늘 성전세를 왜 안 내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그로 인해 베드로가 처하게 된 심리적, 현실적인 난처함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부분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한 마디로 관용이 부족했는데 특히 가까운 가족들에 대해 그러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 ‘신부인 교회’와 ‘전투원인 교회’ 부분을 추구하는 것만을 중요시하고, 합당한 인간생활(원만한 인간생활) 부분은 소홀히 해 왔습니다. 제가 지금이라도 이런 부족을 깨닫게 하신 것은 주님의 큰 긍휼입니다. 이런 빛비춤 후에 아침에 읽은 새사람과 관련된 아래 말씀이 제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인자와 겸허와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으로 입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옷으로 입으십시오.”(골 3:12, 14).
오 주님,
저의 영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당신이 점유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당신의 속성이 저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합당한 인간 생활을 갖게 하소서!
특히 저와 가까운 이들에게 그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