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도가 ‘소명(召命) 받았다’ 혹은 ‘주님의 ‘콜링’(calling)이 있었다’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대개 그가 신학교 가거나 혹은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이고, 그런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기존의 평신도적인 관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묵상한 아래 말씀은 이러한 기존의 인식과는 매우 다르고, 또한 소위 ‘콜링’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부름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님들,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라고 우리가 시인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히3:1).
-하늘에 속한 부름(heavenly calling): 아침에 위 말씀을 묵상할 때 ‘부름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님들’이라는 표현이 먼저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물론 수신인들 또한 부름받은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부름’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클레시스’(2821)가 사용된 다른 구절들(롬11:29, 고전 1:26, 7:20, 엡1:18, 4:1, 4, 빌3:14, 살후1:11, 딤후1:9, 벧후1:10)의 내용도 이 점을 뒷받침해 줍니다.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중 몇 구절을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형제님들, 여러분을 부르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로는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출신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고전1:26). “그러므로 주님 안에 갇힌 사람인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오 …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오”(엡4:1, 3).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름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입니다(딤후1:9).”
위 본문 내용은 그분의 부르심(콜링)이 거듭난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거듭나는 시기와 실제로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는 시기가 다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 성경이 말하는 ‘소명’이 신학생이나 목회자 혹은 선교사와 같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도이신 예수님: 흔히 사도라고 말하면 예수님의 열두 사도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주 예수님 또한 사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사도’의 원래의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역시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요8:16, 29). 아침에 보냄 받으신 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다가 그분은 무슨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을까를 묵상하게 되었고, 다음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심으로써,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갈4:4-5).
많은 분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의 죄 사함(구속)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구속의 목적이 죄인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아들의 자격’으로 번역된 ‘휘오데시아’(5206) 참조)이 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이 점은 주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10:10하)라고 하신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 사도이신 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참으로 빛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이 구절뿐 아니라 히브리서 다른 곳(히2:17, 4:14, 7:26)에서도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말씀합니다. 관련 구절들을 찾아서 묵상할 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백성의 죄들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신 분”,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 “때맞추어 도움을 주시는 분”,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달리,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구약이 묘사하는 제사법에 대한 실행이 없다 보니 솔직히 ‘대제사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나마 한 가지 익숙한 것은 대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엔튕카노, 1793)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도 사실은 성경의 원래 의미와는 많이 다르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생각에는, 무엇이 필요해서 대제사장이신 그분께 요청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아버지께 전달해 드리는 식의 기도를 하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용된 로마서8장 27절과 34절의 전후 문맥에 비춰볼 때, 그분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롬8:28)을 이루는 데 초점을 두실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겪는 모든 환경이 협력하여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28-29절).
아침에 이러한 세 가지 요점(부르심, 사도, 대제사장)을 깊이 묵상할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부름받은 우리”와 “사도이신 예수님” 그리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모두 한 가지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아래 말씀에 따르면,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신약의 하나님의 집(딤전3:15)인 교회(그리스도의 몸)를 관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우리의 부름받은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 때문에 생긴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히3:6).
즉 사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죄들의 용서와 신성한 생명을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우리의 약함과 문제들을 돌보시고 동정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마음을 열고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 이 생명의 공급을 받도록 도우십니다. 그 결과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이 이루어지고”(롬8:29, 갈4:19), 요한일서 본문 말씀처럼,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그분과 같아지게(요일3:2) 됩니다. 이것이 부름받은 우리 모두의 소망인 하나님의 집이 ‘되는’(to be) 결과를 산출하게 될 것입니다(엡1:18, 마16:18).
오 주님, 우리를 파멸의 무더기로부터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부르심이 특정인만이 아닌 거듭난 모든 이들의 특권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을 속히 성취하소서.
오 주님, “소망때문에 생긴 담대함과 자랑을 굳게 잡음으로”
속히 당신의 집으로 건축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