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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9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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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사복음서를 통하여 풍유(allegory)와 풍자(irony) 등의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는 땅의 것을 들어 천국을 보이시고 전도를 위한 주님의 세심한 배려에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하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전도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주님의 책망하심은 땅의 일을 들어서 천국을 보여도 믿지 못하는데
어찌 천국에 관한 일을 직접 말한다고 해서 너희가 믿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요3:12)
여기서 땅에 일의 비유 속에 천국을 보이심에 있는 그 자체가 풍유적인 비유로서의
영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복음서에 이러한 비유가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주님은 전도의 대상자에게 천국을 전도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심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후에, 복음 안에 들어온 성도들에게는 사도들을 통하여 이러한 비유를
거의 사용치 않으시고 천국의 교훈을 직송하심으로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속히 이를 수 있도록 지식에 지식을 더하는
성경으로 이어지고 있는 배려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이미 천국에 전도된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풍유적인 교훈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천국의 일을 바로 말해도 다 알아듣는 영의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도의 시스템은 초기 전도의 대상자들이나, 천국의 기초지식을 쉽게 무리 없이
잘 가르치는 신앙의 교육법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의 큰 문제는 이러한 기초지식의 교육법을
평생에 설교 안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나아가 이에 충족케 하려고 온갖 철인들의 말과 예화나 우화 등으로
한 귀절의 교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다 소진하고 있다.
이에 더 발전해나가니 오늘의 설교자는 순간의 감정과 감동에 호소하는
웅변쟁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바로 성경을 곡해하는 위험성이
아무 여과 없이 그냥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풍유를 들어 이를 만족케 하려고 여기 저기 온갖 성경을
휘몰아 다니면서 문장과 귀절의 본뜻은 무시되고 필요한 귀절의 교훈을 마구
인증하여 가르치므로 진작에, 인증된 귀절이 그 본문에 충실함을 떠나 홀로 떠도는 객의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많은 성경의 본문이 왜곡이 되어지고
동시에 이로 인한 폐단은 성도가 교훈의 지식에 대하여 인격적이 틀이 만들어지지
않고 교훈에 대하여 산만을 이루며 그 많은 지식이 분산적이어서
신앙에 실리도 없을 뿐 아니라, 지식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하여
능력이 발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른 성도의 폐단이 곧 빛과 소금의 역할 된, 능력으로 소화가 되지 않고
빛과 소금의 모양만 겸비(兼備)되는 형틀로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쉽게 말하여 말 잘하는 또릿또릿한 아이는 되어도 어른의 역할은 아직 아니다라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성도는 잘못된 이러한 교육법으로 몸은 장성한 어른인데
영은 아직 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무는 영적 기형이 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