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같은 소그룹 한 자매님의 딸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2년 전에도 갑작스럽게 형제님을 주님 품에 보내드린 아픈 경험이 있으신데, 이번에 시집갔던 큰딸도 암으로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남겨진 어린 외손녀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돌보는 일도 자매님의 몫입니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 계신 자매님에게 지체들의 따뜻한 관심과 위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살다 보면 이런저런 환경이 닥쳐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발견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성경 읽기 진도표를 따라 아침에 읽은 말씀이 마침 아래와 같은 고난과 위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어,
우리 자신이 그분께 받은 그 위로로 각종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은 위로도 넘치기 때문입니다(고후1:4-5).
처음에는 이 말씀을, 먼저 고난을 겪은 사람이 나중에 비슷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 다섯 가진 과부가 아이 둘 남기고 남편이 죽은 이에게 다가가서 묵묵히 손만 잡아주어도 위로가 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곱씹을수록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the sufferings of the Christ abound unto us)’라는 부분이 잘 소화가 안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이 말씀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도우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며칠째 이 말씀을 여러 번 다시 읽고 묵상하고 또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회복역 각주를 읽은 후 더 분명해진 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제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에 참여한 것”(각주 2)을 가리킵니다. 같은 취지의 ‘고난’이 다른 여러 곳(마20:22, 빌3:10, 골1:24, 벧전4:13)의 말씀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땅에서 고난받으신 것은 시간적으로도 먼 과거이고, 사도 바울 당시는 물론 그로부터도 더 후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체험할 수 있을는지…. 오 주님 저는 너무나 지력이 제한되고 빛이 부족합니다. 주님의 일깨워주심을 앙망하면서 위 각주에서 언급된 아래와 같은 관련 본문 말씀들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잔을 여러분이 마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시자,
“그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 잔을 마실 것이지만…”(마20:22-23).
나는 …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빌3:10).
이제 나는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골1:24).
사랑하는 여러분, 불같이 혹독한 시련이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닥쳐올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기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만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벧전4:12-13상).
이러한 말씀들과 각주들을 통해 제게 정리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분의 구속의 죽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은 전적으로 죄 없는 분의 피에 근거함으로 우리에게는 참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골1:24).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엡5:25), 교회 구성원들은 어떤 믿음 생활을 살아야 할지를 그분의 인간 생활을 통해 미리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로 인해 사는 삶입니다(요6:57). 그분에게는 이 땅에서 아버지의 인격을 살고 표현하는 삶을 사는 과정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저명한 성경 교사인 다아비는 고린도후서 1:5의 ‘그 그리스도’(the Christ)를 “여기에서 ‘그 그리스도’는 하나의 명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각주 1).
사도 바울도 위 <자기 부인과 부활 생명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틀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도 같은 길을 가기 원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우리에게도 “여러분이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된 것같이…”(고후1:7)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옳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빌3:10)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각주 내용으로도 재확인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활의 틀로 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요6:57), 인간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인간 생명에 대하여 죽고 신성한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서두의 그 자매님뿐 아니라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길을 선택한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고후1:7)이 되려면 각자가 처한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신성한 생명’(거듭날 때 우리 영 안에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사는 것이 요구됩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 성경의 어떤 말씀을 천연적인 이해로 우리 현실에 적용하지 않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먼저 그 말씀의 원래 의미 안으로 들어가 성경 기자의 부담을 만지는 것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고난’이니 ‘위로’처럼 흔히 쓰이는 용어조차도 성경에서 사용된 의미는 더 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경륜(딤전1:4)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오 주님, 매 순간 천연적인 생각에서 구원받기 원합니다.
매 순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당신을 살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고난을 통과하고, 또 당신 자신을 위로로 취하기 원합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고난받으셨고,
우리가 그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남겨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