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주 예수님께서 잡혀서 심문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과정을 묘사한 요한 복음 18-19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그분께 덮어 씌운 여러 죄목들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요19:4, 히4:15). 심지어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며”(고후5:21), “거룩하고, 순결하시고, 더럽혀지지 않으시고, 죄인들과 구별되신 분”이십니다(히7:26).
그럼에도 영적으로 눈 멀고 무지한 유대 종교인들과 부패한 로마 정치인들은 결탁하여 죄 없으신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도 바리새인들은 늘 못마땅하게 여겨 죽일 명분을 찾았습니다.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마12: 14).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 “어허!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건축하겠다던 자여, 너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하고 비꼬았습니다(막15:29-30).
그러나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죽을 죄를 지으셨다고 고소한 내용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과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 예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부하고 또 구약 성경을 가졌다는 종교인들 그리고 로마 정치인들은 아래에서 차례로 보겠지만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에 따르면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요19:7).
성경은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갈4:4).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생소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멸시받는 지역인 나사렛 목수의 아들에 불과한 한 청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 먼 그들과 달리, 베드로(마16:16-17)와 회심 후의 바울(행9:20)은 주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또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
보통은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요5:18). 그러나 제가 아침에 누린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님의 33년 반의 지상 사역시 수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한 마디로, ‘아들로서 아버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본인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다”(요6:57상)고 하셨고 아래 구절들도 그것을 보여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들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요5:19).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므로 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때문입니다”(요5:30).
“내가 판단할지라도 내 판단은 참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요8:16).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늘 아버지를 근원으로 삼으시고, 아버지에게 보고 들은 것만을 말씀하시고,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 사시고 표현되시도록 늘 자신을 부인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요1:18).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롬8:29, 히2:12)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한편 아래와 같이 그분께서 유대인의 왕이신 방면에 대해서도 깊은 누림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여러분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소?”라고 하니,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요19:15-16).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면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빌라도 총독을 압박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이 “민족을 미혹하는 자”이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한다”라고 거짓말까지 보태어 참소했습니다(눅23:2).
그러나 주 예수님은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셨습니다(슥9:9).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께서 어디 계십니까?”(마2:2)라고 물음으로써 아기 예수로 오신 그 분께서 예언되어 온 그 왕이심 알아 보았지만, 구약에 능했던 많은 이들은 눈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주 예수님의 말씀에는 늘 위엄과 권세가 있었고 그분의 삶의 궤적은 참으로 왕다우셨습니다(계17:14, 1:5). 그러나 세속적인 왕의 이미지와 달리, 그분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만큼 겸손하셨고, 생명과 사랑과 빛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땅아래 있는 이들의 모든 무릎이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빌2:10).
이상과 같은 부분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창세기 1장 26절의 인간 창조 목적이 주 예수님 안에서 1차적으로 완벽하게 성취되셨다는 강한 빛이 왔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하셨고 왕으로서 그분을 대표하여 다스린 분이십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자 그분과 함께 왕노릇 할 우리 안에서도 이 실재가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왕 중의 왕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본을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당신을 먹음으로써(요6:57하) 우리도 당신처럼 아버지를 표현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