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에 관한 동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들과 여호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마16:15)의 차이가 갈등의 뿌리인 셈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닉 쥬’들 역시 ‘그리스도 더하기 그 무엇’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믿되, 안식일과 절기와 토라 (Torah)도 함께 믿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교리를 고집함으로써 또 하나의 교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고 그분만을 목표 삼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빌3:12).
아침에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을 깊이 묵상하고 누렸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회복역 성경 각주는 7절 서두의 ‘그러나’에 대해, ”3장 7절과 8절은 이 책의 심장부(heart)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함>이 주제인 빌립보서, 그중에서도 위 인용 부분이 그 심장부에 해당된다고 하니, 좀 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 말씀을 온종일 묵상하고 또 추구할 때 많은 감상과 느낌이 있습니다.
'오 주님, 이러한 바울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얼마나 섞여 있고, 불투명하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도 보류하는 것이 많은지요! 더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 한 분만을 추구하고 또 얻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 구절에서 처음에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하다가, 그다음 구절에서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 안에 ‘그리스도냐,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잣대가 들어 있고,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것은 실제의 삶 속에서 철저히 비워 온 것을 봅니다(‘have counted as loss’라는 동사의 시제 참조). 어떤 이는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고 극단적인 이원론 혹은 치우친 인생관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울이 간 길이 바른길이고, 이것을 비판하는 쪽이 틀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준에 따르면, 위 메시아닉 쥬가 고집하는 ‘안식일과 절기의 준수 그리고 토라’ 역시 그리스도 자신은 아니므로 “해로운 것” 혹은 “배설물”로 취급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더 깊이 있게 추구했던 부분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to be loss)와 ‘그리스도 때문에’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바울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 혹은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얻는’ 그 목적과 함께 놓고 본다면 해롭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 앞 구절들(5-6절)에서 열거했던, ‘할례 받음’,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출신, ‘교회를 박해하는 열심’, ‘율법으로 나무랄 데가 없음’ 등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고 유대교 실행에 열심일 때,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딤전1:13, 고전15:9, 행8:1-3). 즉 그런 것들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하고 더 나아가 대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 멀었던 사울이 마다스쿠스 길에서 기적적인 회심을 경험한 후에는, 위 본문에서 보듯이 그의 가치관에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둘째, 왜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혹은 ‘성령’ 혹은 ‘말씀’) 때문에’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때문에” 라고 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울은 해당 구절 외에, 계속 이어지는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를 초점 삼아 말하고 있습니다(빌3:9-12).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한 새사람”을 얻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엡3:3-6, 4:24). 즉 하나님께서는 ‘한 단체적인 변화된 사람’(혹은 인성, humanity)을 통해 표현되시고(엡4:13), 만물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한 새사람은 다름 아닌 ‘머리이신 그리스도’(골1:18)와 ‘그 몸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이십니다. 즉 그리스도가 중심(hub)이시고 둘레(rim)이셔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단지 삼위 중 한 위격만이 아니라, ‘만유’(Christ is all)이셨습니다(골3:10-11). 즉 그리스도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을 지니신 분”(골2:9),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골2:16-17),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소유하신 분’(엡3:8)이십니다.
여기까지 묵상하다가 문득 에베소서 4장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심이 생각났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사자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을 보내사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몸’이나 ‘성령의 몸’이 아닌)을 건축하게 하는 것입니다 (엡4:11-12).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 하나”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고(13절),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가는 것”을 말합니다(15절). 또한 “온몸은 그분(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근원 삼아 자라고 건축된다고 말합니다(16절).
이런 추구와 묵상을 통해 왜 사도 바울이 ‘유익하던 것’ 심지어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얻고자 했는지 그 마음이 조금은 만져졌습니다. 자신도 바울처럼 유익하던 것과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선포할 담대함은 아직 없지만, 장차 어떤 길을 가야 할지가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오 주 예수님,
이 아침에 빛 가운데 나아갈 때 여전히 처리 받아야 할 부분이 많음을 시인합니다.
당신 한 분만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제 안에서 더 역사하옵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지위를 대치하는 모든 것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처리되게 하소서!
그 빈 곳을 당신의 생명과 빛과 거룩과 의와 영광으로 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