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신약성경 디도서를 읽으면서, 사도 바울은 이런 깊은 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싶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생명’에 대해 언급한 대목입니다(딛1:2). 평범한 믿는 이들인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것은 주로 이미 쓰여진 신 구약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살던 때는 지금 같은 ‘정경’(Canon)이 확립되기 훨씬 전입니다. 또한 회심 전의 바울은 신약의 주인공인 주 예수님을 부정하던 자였습니다. 심지어 그가 회심 후에도 그 당시 “유명하다는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나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갈2:5)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런 깊은 말씀들은 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로”(엡3:3) 그에게 알려주셔서 알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사도 된 것은 …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딛1:1-2).
솔직히 이 말씀을 읽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문제가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라는 인식은 없었습니다. 아침에 위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어서 각주와 관주의 도움으로 생명에 관련된 다른 본문 말씀들을 찾아서 읽어나갈 때, 너무나 풍성했고 벅찬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누린 내용을 간략하게 핵심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심: 위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신약 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영원 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아버지는 창세 전에 아들 안에서 …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도록 하셨다…. 아버지께서 영원 안에서 아들에게 주신 믿는 이들(요17:2)은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의 형제들이 될 것이다(엡1:5).
아무튼 영원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었던 이러한 비밀스런 ‘약속’을 바울은 어떻게 알아내어 이런 글을 썼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비밀스럽기만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을 주심: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 듣는 사람들은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신 것같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어 아들 안에도 생명이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요5:25-26).
그렇다면 성부께서 언제 성자에게 생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 말씀은 참이요 사실이므로 믿을 만하므로 다만 아멘으로 화답할 뿐입니다
-아들께서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심: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10:10). 어떤 분은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이 주님은 자신이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서로 모순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그 전 단계로 먼저 죄들의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죄들의 용서는 생명의 분배를 위하여 필요했던 사전 절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영원 안에서의 아버지의 약속을 이루도록 보냄 받은 메시아는 부활 후에 자신이 직접 “생명을 주시는” 존재(영)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 자체(요11:25, 14:6)이시기도 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우리 존재 안에 모셔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존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다”라고 말씀합니다(요일5:12).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이 생명을 얻고, 심지어 생명이 됨: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려면 이 신성한 생명이 아들 하나님 안에 계신 것만으로는 안 되고, 이제 피조된 존재인 우리 안에도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로마서 8장 10절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영은 의 때문에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영’은 전후 문맥을 볼 때 성령이 아니라 사람의 거듭난 영입니다. 또한 6절은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자세히 보면, 본문은 ‘영의 생각’(the mind of the Spirit) 혹은 ‘영에 둔 생각’(the mind set on the Spirit) 자체가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생각은 사람의 혼의 주도적인 부분입니다.
이어서 11절은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죽을 몸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생명을 체험할 것이나 죽음이 우리 몸에서 완전히 정복되고 삼켜지는 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 이뤄질 때입니다(롬8:23, 빌3:21). 창조물들도 우리의 비천한 몸이 변형되어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상이 되는 그날을 지금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19).
-영원한 생명의 소망: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는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오는 시대와 영원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아”(마19:29) 온전하고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들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딛3:7).
아침에 이러한 생명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가 깊이 마음에 남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을 때 저자의 부담을 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원 안에서 약속된 이 생명이 분배되는 그 영역 안에 머물기를 힘써야겠다는 것입니다.
오, 거짓말 못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생명을 주사 당신의 아들의 자격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남은 날들 동안에 이 약속이 이뤄지는 실재 안에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