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인 저는 솔직히 ‘신부 단장’이란 말이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물론 신부 단장이 결혼식 당일에 미장원 가서 신부 화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결혼을 앞두고 신부로서의 마음가짐을 예비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말을 들으면 어릴 때 외가댁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결혼을 앞둔 막내 이모께서 화롯가에서 인두로 지져가며 골무(바느질할 때 손가락을 다치는 것을 막거나 바늘을 눌러 밀어 넣기 위해 손가락에 끼워 쓰는 재봉 용구)를 만드시던 단아한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런데 사람끼리의 결혼도 아니고 <주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결혼>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신부 단장이란 말은 더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에 대한 반응도 각각 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어찌 창조주와 피조물이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느냐며 참람하다는 식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인터넷에 떠다니는 유튜브들에서 어떤 목회자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오니 우리가 신부 단장을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하는지를 말하는 대목을 보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눈에 뜨입니다. 전자는 본의 아니게 관련 성경 기록까지 부인한 결과를 가져오고, 후자는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성령 춤’ 등의 피상적인 신부 단장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아침에 신부 관련 몇 구절의 말씀들을 먹고 누릴 때,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결혼의 주체 그리고 신부 단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계19:7-8).
위 말씀에 따르면, 이 결혼식의 당사자인 신랑은 “어린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요3:29-30), “신부”는 그분의 “성도들”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고후11:2)라고 한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부를 단장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위 말씀에 자체에 따르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즉 성도들인 우리들의 ‘의로운 행실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하여 2016년 추수감사절 집회 때 전해진 메시지 개요를 추가로 추구해 볼 때, 신부 단장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가 핵심 요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제 안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첫째, 실질적인 신부가 될 때까지 생명이 성숙해야 합니다(엡4:13).
하나님께서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오셔서 유기적으로 연합되신 것을 가리키는 거듭남(요3:6)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영적으로 더 자라가야 합니다(고전3:6). 어떤 이들은 거듭나기만 하면 다 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에는 영적인 “어린 아기들”(고전3:1)과 “장성한 자”(히5:14)를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신부 역시 성숙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가 결혼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둘째, 각 개인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한 단체적인 신부의 수준까지 긴밀히 건축되어야 합니다(계21:2).
계시록 21장 2절은 새 예루살렘을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이나 ‘신부’(a bride)는 모두 단수입니다. 이 점은 계시록 21:9-10(이리 오십시오.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드리겠습니다)과22:17(그 영과 신부께서 말씀하십니다)에서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이들은 각자 영적인 성숙의 길을 추구해야 하지만(빌3:12-15), 동시에 다른 이들과도 하나의 단체적인 인격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함께 조율되고 건축되어야 합니다(고전1:10, 엡4:3,13, 16, 요17장).
셋째, 어린양의 신부이므로 ‘아름다워야’ 합니다(아1:15-16).
아가서 1:15-16에서 솔로몬은 사랑하는 연인인 술람미를 향하여, 세 번이나 “Oh, you are beautiful”(너는 어여쁘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신랑이신 주 예수님의 예표이고, 술람미는 신부인 우리의 예표입니다. 시편 기자도,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시45:11)라고 말합니다.
오 주님, 그렇다면 이러한 신부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지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은 에베소서 5장 2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점이나 주름이나 그 같은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신부의 아름다움은 먼저 ‘점’(spot)이나 ‘주름’(wrinkle)이나 ‘흠’(blemish)이 제거된 모습입니다. 우리의 옛사람, 즉 타고난 생명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이 어린 자들은 물론이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점박이 늙은 신부’도 최고의 신랑이신 어린양의 신부로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면에서 본 신부의 아름다움은 신랑이신 주님 자신의 ‘신성한 속성들’(divine attributes)이 신부의 ‘인간 미덕들’(human virtues)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광스러운”(교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 방면의 신부 단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에 대해 묵상할 때 주님은 한 구절의 말씀이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즉 에베소서 5장 26절 말씀에 근거하여,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말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여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와 1) (모든 주름과 점과 흠을) “깨끗이 씻고”, 2) (생명의 요소를 더하여 자라고 건축되도록) “거룩하게 하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불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어울리는 신부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더 주님 자신으로 단장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