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40회 - 노예들에게 보이시려고
에세이
청지기 , 2023-06-23 , 조회수 (531) , 추천 (0) , 스크랩 (0)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내용에 흥미 있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책이 또한 계시록입니다. 그것은 우선 책 내용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이단들이 이 책을 함부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 그리고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계1:3).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당연히 읽어야 할 뿐 아니라 이 계시록 말씀을 잘 알고 또 지켜야 합니다.

 

아침에 계시록 1장 1절을 읽으면서 이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들”에게 “보여주시려고” 쓴 것이라는 대목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만일 누구든지 ‘주님의 노예 위치’에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여러 번 읽고 또 연구하더라도 계시록의 참된 내용을 보거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속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천사를 자기 노예 요한에게 보내시어, 이 계시를 표징들을 통하여 알게 하셨습니다(계1:1).

 

 

그런데 좀 더 깊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위 본문의 ‘노예’의 위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다소 현실적인 난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한글과 영어 성경 대부분이 위 ‘노예들’(slaves)을 ‘종들’(servants)로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오직 헬라어 원문을 직역한 (Hendrickson)만이 ‘His slaves’(그분의 노예들)라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물론 원문에 충실한 <신약성경 회복역>도 ‘노예들’로 번역함). 참고로 주님은 “누구든지 크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디아코노스)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노예(둘로스)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둘을 구별하여 사용하셨습니다(마20:26-27).

 

흥미로운 것은 목회자 중에 헬라어 둘로스를 ‘종’이 아닌 ‘노예’로 번역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교계 행사 설교에서, “이스라엘에는 노예가 있었고, 노예를 뜻하는 단어가 ‘둘로스’였다. 그러나 성서가 번역될 당시 노예제도와 같은 정치적인 논쟁이 있었고, 이에 둘로스라는 단어를 ‘노예’ 대신 ‘종’이라는 단어로 격상시켜 번역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이 아닌 노예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전중식 목사님, 뉴스파워, 2012.3.19일 자 기사 참조).

 

종과 달리 노예는 주인에게 ‘생살여탈권’이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주의 종’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님의 노예’라고 깊은 속으로부터 고백할 수 있고, 노예의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을 묵상할 때, ‘오 주님, 저는 당신 앞에 어떠한 자인지요? 당신은 피 값을 주고 저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되사오셨지만(갈3:13), 노예된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저의 주인으로 대우해 드리지 못했음을 깊은 속에서부터 시인합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둘째는 번역이 잘못된 결과, 성경에서 소개된 ‘노예의 사례들’이 모두 ‘종의 사례’로 인식된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둘로스’(노예)에 걸맞은 대표적인 사례는 주님 자신이십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종이십니다(행3:13, 26, 4:30). 그러나 성경은 또한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으나 … 노예 (둘로스)의 모습을 가지시어”라고 하여 주님이 노예이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주님은 노예로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의 노예요 부름 받은 사도인 바울”(롬1:1)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또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내 몸에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갈6:17). 즉 목장에서 소유권의 표시를 위해 말이나 송아지에게 불로 달궈진 낙인(brand)을 찍는 것처럼,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노예라는 낙인(흔적)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 회복역 각주는 그 ‘낙인’ (스티그마, 4742b)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인 바울에게 찍힌 그 낙인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섬길 때 육체에 받은 상처 자국들이었다(고후11:23-27). 영적으로 그 낙인은 …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것과 같은 생활의 특징들을 상징한다. 그러한 생활은 (1)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며(요12:24), (2)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요6:38), (3)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요7:18), (4)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다"(빌2:8).

 

 

이제 다시 처음에 언급했던 계시록 1장 1절로 돌아가 볼 때, 밧모 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 본인 또한 주님의 ‘노예’였음을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 예수님, 사도 바울, 사도 요한은 공통적으로 1) 노예의 위치에 있었고, 2) 주인(혹은 주님)의 지시 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고(출21:6, 요5:30, 시40:6, 사50:4-5, 계2:7), 3) 주인이 지시한 것을 이루도록 충성을 다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요한계시록의 핵심은666표나 대환란이나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입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라는 이 책 첫 문장처럼, 이 책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따라서 그가 참으로 주님의 노예라면 자기 주인이신 이 분을 가장 먼저 관심할 것이고 또 이 분이 하시는 일의 ‘중점’에 주목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계시록에서 우주적인 행정을 수행하시는데, 그 중점은 그분 자신의 확대인 일곱 금등잔대로 예표 된 ‘일곱 교회’를 돌보시는 것입니다(1-3장).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노예들인 각지의 구속받은 믿는 이들(고전6:19-20)에게 ‘기름’(그 영)을 공급하사 금등잔대들이 계속 빛나게 하고, 심지의 ‘불똥’(옛사람의 표현)을 잘라내어 그을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하심의 최종 결과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계21:2, 9-10). 따라서 우리는 ‘주 예수님 자신 ‘일곱 금등잔대’(일곱 교회), '새예루살렘’이 적극적인 방면에서 본 요한계시록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의 노예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노예의 위치에 서서 당신을 섬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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