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37회 - 몸 안에서 분열이 없이
에세이
청지기 , 2023-06-02 , 조회수 (468) , 추천 (0) , 스크랩 (0)



아침에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여호수아서를 기도하며 읽었습니다. 비록 22장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읽어나가면서 받은 인상을 통해 신약 용어인 ‘몸 의식’(Body consciousness)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산 간증을 짊어진 유일한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인 요즘은 “내면적 유대인들”이자(롬2:29) 단체적인 “아브라함의 씨”(갈3:29)인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간증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은 우리에게 본보기이며, “시대의 끝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고전10:11)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는 요단강 저편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이 가축 기르기에 적당함으로 다른 지파들보다 먼저 그곳을 분깃으로 취합니다(민32:1-5). 그 후 그들은 모세에게 굳게 약속한 대로 처자와 가축은 일단 그곳에 남겨 두고, 용사 4만 명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 싸움에 참여합니다(수4:12).

 

여호수아 22장은 약 7년 가량 이어지던 가나안 1차 정복 전쟁이 마감된 후에(수11:23), 두 지파 반이 여호수아의 허락과 축복의 말을 듣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간 후에 일어난 한 사건을 다룹니다(수22:6). 즉 그들이 소유지인 길르앗으로 돌아 간 후 요단 언덕 가에 큰 단(altar)을 쌓은 것이 야기한 쌍방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수22:9-10).

 

 

단지 제단 하나 쌓았다고 내전까지 불사할 기세로 긴장이 촉발된 상황을 놓고 주님 앞에 묵상할 때 몇 가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도 마땅히 분열에 대해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야 함에도 전반적으로 감각이 많이 무디어져 있는 것 같아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첫째, 몸 안에서 교통의 부족은 갈등을 가져 옴: 이스라엘 자손은 두 지파 반이 예루살렘 외에 또 다른 제단을 쌓은 것은 결과적으로 여호와를 거역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고” 했습니다(수22:12). 그러나 막상 실상을 알고 보니 그 단은 훗날 세월이 흐른 후에 이스라엘 회중의 후대들이 강 저편에 있는 자신들의 후손들을 배제시킬 것을 우려하여 모두가 한 백성임을 상기시키는 증표로 삼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쌍방의 오해는 풀렸고,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했습니다”(33절).

 

이 대목을 묵상할 때 비록 좋은 취지로 어떤 것을 실행하지만 충분한 교통이 없을 때 몸 안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염려를 가져올 수 있음을 봅니다. 오 주님, 몸 안에서 어떤 것을 추진할 때 순간순간 멈추어 서서 다른 지체들과 교통하는 법을 더 배우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둘째, 주님의 몸은 공동 운명체임: 강을 건너 따지러 간 측이 두 지파 반 쪽에게 제시한 논리는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해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했고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20절)는 것이었습니다. 즉 “브올의 죄악”(17절)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부가 죄를 죄어도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화가 임하는데, 당신들이 죄를 지어 우리 전체가 망하게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원주민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공동 운명체임을 깨닫게 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즉 미리암이 육신의 동생인 모세를 비난하다가 문둥병이 걸려 정결케 되는 칠일 동안, 미리암 개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진행을 멈추고 그녀가 정결케 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민12:15-16). 위 아간의 죄 역시 특정 개인이 저지른 것이었지만 그러한 개인의 숨은 죄악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Ai)성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숨은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대분열 이전에는 참된 교회의 ‘통일성’을 깨는 분열은 지금과 달리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대적에 의해 한번 분열이 있게 되자 그 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의 반 간증으로 서 있는 주의 회복이 이 분열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교회 안에 온갖 추악한 문제들은 이 분열이 근본 뿌리입니다.

 

셋째, 세대 교체에서 오는 위기 관리: 저들이 요단 강가에 단을 세운 것은 향후 다음 세대끼리 있을 수 있는 갈등을 미리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외부 환경이 급격히 세속화 되고 또 적 그리스도화 되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변함없이 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면서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 준 고귀한 신앙 유산들을 후대에까지 이어가는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넷째, 몸 안에서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한데서 오는 부작용: 사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두 지파 반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필요보다는 자신들의 필요를 먼저 고려한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세계에서 조차도 주님의 몸의 필요보다도 자신의 필요를 먼저 고려하는 것은 흔히 보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모두가 자신의 일만을 관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은 관심하지 않음으로” “자기와 같은 혼이 되어” “빌립보 교회를 진심으로 돌볼 사람”이 디모데 밖에 없다(빌2:20-21)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주님 앞에서 묵상할 때 여호수아 22장은 더 이상 구약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폭로하고 투명하게 비추는 엑스레이와도 같이 다가옵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이런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생활 방식에서
철저하게 구원받기 원합니다.

좋은 땅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한 백성, 한 몸,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로 서 있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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