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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3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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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는 하나님 형상의 기능]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거나 또는 없다고 하거나 하는 논쟁은 구원론과 깊이 관련된다.
구원론의 입장에서 다루는 것은 특정한 신학적인 입장으로 자유의지를 약화시키거나 또는 자유의지를 기대이상으로 두각 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본질적인 측면과 자유의지 그리고 관계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유의지를 논하려고 한다.
사람은 영혼이 있으며 이 영혼은 자유의지라는 기능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을 가진 사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러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락도 구원도 가능한 것이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기능이다. 동물들이 선택하는 기능은 육체적인 본능에 의존한 혼의 선택이라면 사람의 선택의 기능은 육체적인 본능을 선택하는 혼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또한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 그 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기능을 하는 영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죄로 말미암아 신에 대한 만족을 주지 못한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죄로 말미암아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인 영혼은 있으나 바른 선택을 못하는 그릇된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본질인 영이 선택이라는 자유의지의 기능을 사용할 때에 그릇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과 육으로 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영혼이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용하더라고 스스로 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자유의지로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일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보내시고 우리에게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와 같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진리인 예수를 선택하여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사람의 기능이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의지로 구원이 가능한 시작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의지가 발동 될 때에 구원이 이루어진다. 우리의 독자적인 자유의지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먼저 하나님의 선택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구원이 가능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자유의지로 얻게 된 것이다.
자유의지는 영의 기능이다. 동물은 자유의지로 활동한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만들어진 본능(혼)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적인 활동보다 우수한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지의 원천은 영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의 선택으로 혼으로 말미암아 육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삼분설의 입장으로 논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본질적인 기능을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영과 육의 연결은 혼으로 된다는 사실은 혼의 기능이 영의 선택을 육체 안에서 표면화 시킨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적 움직임은 혼이라는 동물적인 본능과 함께 고등한 영적인 선택이 추가된다는 것이며 이 혼의 기능과 영의 기능이 완벽하게 조화된 것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혼의 기능으로 사람의 육체가 움직이고 나타난다는 것은 사람의 구조와 깊숙이 관련된다. 자유의지는 이렇게 영에서 출발해서 혼으로 전달되고 혼은 육체를 움직이므로 자유의지의 선택과 외적인 모습과 활동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본능과 본성 그리고 본질과 삼위와의 관계]
육체가 있으면 본능이 있다.
이러한 것은 모든 육체를 가진 생명은 본능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본능을 가진 육체와 분리시키는 것은 의미 없다.
육체는 본능을 가진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니듯이 육체의 본능도 악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 안에 죄가 거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사람의 육체 안에 죄가 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육체와 죄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죄는 세상에서 사람이 범죄 함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죄가 육체 가운데 왕노릇 하듯이 죄가 역사하는 기간도 육체의 기간까지라는 점이다. 만약에 당신의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은 당신 안에 죄가 있어서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탄은 죄를 충동하여서 사람을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를 우리 안에 있게 함으로써 죄를 의가 덮어버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범죄를 짓는 것과 의를 통한 회개가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다. 육체를 가진 모든 자에게 죄는 거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 믿음으로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 죄에서 해방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죄에서 완전한 해방은 육체를 벗고서 얻는다는 사실이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죄는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거한다.
차이가 있다면 믿는 자들 안에는 죄가 있어도 의가 있어서 죄를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지어도 그 의로 사함을 계속적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추가된 글1)
본능은 사람의 육체만이 아닌 동물의 육체에도 존재한다.
사람의 육체의 본능과 동물의 본능은 같은 것이다. 본능은 본능이다.(혼의 기능)
본성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간다는 것은 육체 안에 죄가 원하는 것을 혼으로 말미암아 영이 따라가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을 가진 사람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사람의 육체라고 한다면 우선 영혼을 배제하고 설명하는 것 같으나(그렇다고 영혼이 육체 안에 없다는 것은 아님) 혼으로 육체가 살아있고 영으로 다스려지는 육체라는 것이다.(삼분설 채택) 육체는 육체 안에 질료인 육과 함께 혼을 포함시킴으로 사람의 육체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육체(육과 혼)를 사람의 영(정신)이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
영(생각과 정신의 기능)이 육체 안에 있는 죄의 소욕을 따라가려는 것은 당연하다. 육체 안에 죄가 있는데 영이 가만히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영이 하나님으로 성령으로 온전하여지면(성령)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불신자들은 자신의 영이 스스로 판단하면서 자연히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영은 육체 안에 있는 죄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본능을 사용하여 욕심(정욕)으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이 본성이며 사실상 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사람의 본질을 이야기하려면 삼분설이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삼분설로 성경은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분설로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우리는 이분설과 삼분설을 적절히 사용할 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추가된 글2)
사람이라고 하면 영과 혼과 육 전체를 포함한다.
영과 혼과 육을 통합하여 볼 때에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만을 가지고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는 혼을 또는 육만을 가지고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반듯이 [영, 혼, 육]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육]은 사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말한다면 [영,혼,육]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동물은 같은 본능을 가진다고 말할 때는 [혼,육]이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능으로 말한다. 본능은 [혼,육]에 대한 것이다.(동물에게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동물에게 결코 없는 고귀한 [영]이 존재한다.
그것은 동물들에게 없는 것으로 [혼과 육]을 다스리는 정신적인 본질이다.
동물은 본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에게만 본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영이 있기 때문이다. 영으로 [혼,육]을 따라가려는 성향을 [본성]이라고 말하고 특히 혼육(육체) 안에 있는 [죄]를 따라가려는 성향을 [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영,혼,육]으로 각각 나누어서 거의 말하지 않고 [영혼과 육]으로 보통 나누는 것은 영과 혼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과 육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함으로 [영혼과 육]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실재 사람(영,혼,육)이 죽으면 [영]이 떠난다고 말하지 않고 [영혼]이 떠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육은 흙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낙원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영혼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것을 보면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지만 사람의 본질을 볼 때에 하나님을 닮은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영,혼,육]으로 되었듯이 하나님도 삼위로 존재한다.
우리는 신이라고 말한다면 성부만 말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모두 포함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본질은 삼위로 존재한다.
사람의 [육(장막집)]은 영을 위해서 존재하고 [혼]도 영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은 [영]이 가장귀한 것임이 틀림없다. [육과 영]을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영을 위해서 혼과 육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성부를 위한 성령 그리고 성부를 위한 아들로 생각할 수 있다. 실재로 성령도 하나님의 영이며 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성령과 아들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또 파송되고 성부의 뜻대로 일한다.
그러나 성부는 아들의 뜻을 위해서 또는 성령의 뜻을 위해서 일하거나 파송되는 위치가 아닌 것이다. 통합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성부로 신약시대에 단독으로 설명되는 것도 성부의 위치가 사실상 중요한 위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본질은 삼위로 존재하나 하나님이 세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로 세분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혹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세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그렇게 이단으로 쉽게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잘못 되었지만 분명히 삼위를 세분으로 말하고 이를 하나님이 세분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이단이 되고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면 삼위일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왜 정통 서방신학에서 양태론이 나오는가? 그 이유는 서방신학은 삼위가 동등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동등으로 삼위 모두 하나님으로 볼 때에 삼신론이 나타나게 되자 이를 일체시켜서 한분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 양태론이라는 혼합주의 사상이 나타난 것) 그들은 정상적인 삼위일체를 말하지 못하고 양태론으로 흔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단의 규정은 그러므로 신중하게 되어야 마땅하다. 만약에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혹시 하나님에 대해서 삼신론적인 표현을 가지고 가르친다면 삼위일체가 정립되지 못한 초대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이단이 되어버리는 위험이 있다.
삼위일체의 정확한 이해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추가된 글3)
삼위일체의 연구는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이에 못 미치는 신학이나 앞서나가는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만약에 삼위일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성령을 독자적인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분명히 발생하는데도 보수주의 신학은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침묵을 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어서 단지 하나님이라는 것을 손상시키지 않기에 더욱더 그렇다. 만약에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신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없다고 주장 할 수 없다.
혹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세분으로 알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부가 세분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위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인격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를 가지고 하나님이 세분이라고 표현한다면 이는 삼위에 대한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을 각각 인정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주장과 삼위가 있고 삼위하나님은 세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다.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삼위]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인정하고 [삼위]는 [세분]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말할 때는 [성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앞서 일어난 두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일어난 두 충돌은 모두 사실상 어느 하나를 희생시켜야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만족 시키는 것은 삼위는 삼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서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그리고 [삼위]를 설명하면 하나님은
[성부]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성자]이며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다.
신약시대에 우리가 삼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