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에서 약 60-80%가 물이라고 합니다(통계에 따라 편차가 있음).그 중에서도 혈액의90%가 물이고 뇌는 80%, 근육은 76%가 물로 이루어졌답니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엌으로 가서 물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후 사무실에 있을 때는 플라스틱 물병을 갖다 놓고 천천히 한 모금씩 거의 하루 종일 물을 마시는 편입니다. 물론 이런 습관을 갖기까지는 이런 저런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매일 꾸준히 하는 몇 가지 중 하나인 이 물마시는 습관은 지금까지 별로 돈 안들이고 건강을 유지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물과 관련하여 이런 상식적인 방면 외에, 좀 더 전진된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의 우물가에서 주고 받은 아래의 대화 내용을 깊이 묵상할 때, 물 마시는 문제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요4:13-14).
물론 위 본문에서 말한 ‘이 물’(this water)은 1차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진짜 물 (H2O)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이 영적인 의미가 담긴 책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물’은 더 전진된 어떤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는 이 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을 누리는 것과 세상적인 오락을 통해 얻은 쾌락을 상징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깊은 속에 있는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런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다시 목마를 것이다.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 목마름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한 여인”(18절)은 또한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제게도 “남편”에 해당되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것에서 맛보는 부족 내지는 어떤 갈증은 “또 다른 남편”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즉 어떤 시인이 표현했던 것처럼 “타는 목마름”을 느끼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진짜 수분 부족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이런 연장에서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는 이 부분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첫 번째 남편을 맞이하여 그 ‘물’을 마셔 보았으나 만족이 없었다. 그다음에 그녀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남편을 맞이하여 보았다. 그들 중 아무도 그녀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또 다른 남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을 바꾼 것은 그 ‘물’을 아무리 마셔도 여전히 목말랐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참되다!”
그렇다면 이제 이처럼 갈증만 더해 주는 “이 물”과 대비되는 “내가 주는 물”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 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실 수 있는지가 궁금해 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거듭난 사람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목임에도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강조되지 못한 진리 항목 중 하나입니다.
먼저 이 물은 거듭난 믿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존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따르면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원천이 되어 샘솟아 오른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또한 성경은 이 “내가 주는 물”이 우리가 거듭날 때 영접하여 우리 영 안에서 내주하시게 된 <그 영>(the Spirit, 혹은 Spirit)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요7:38-39). 참고로 여기서 말한 ‘그 영’은 복합적인 영이며 제 3격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출30장의 관유 참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영이신 분을 “마시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12:13).
처음에 이 구절을 대할 때 ‘한 영을 마신다’는 표현은 성령 체험의 역사는 뭔가 강하고, 뜨겁고, 급격한 변화를 유발하는 어떤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여기서 말하는 영은 어떤 ‘능력’이 아니라 한 ‘인격체’이심을 알게 되고, 그분과 대면하는 일 역시 인격적인 관계에 속한 것임을 알아가면서 이런 천연적인 생각에 근거한 너울이 벗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는 물”을 어떻게 마시는가? 아침마다 주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백하여 보혈의 씻음을 얻습니다. 또한 말씀 한 두 구절을 깊이 묵상하고 먹음으로써 그로부터 오는 씻음(엡5:26)과 영적인 요소의 공급을 받아들입니다. 혹은 그냥 단순히 그분께 존재를 돌이켜서 ‘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뜬 후 침대에 잠시 더 누운 상태로 주님의 이름을 깊이 호흡할 때 즉시 내면에서 어떤 적셔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떠오르는 구약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아 2장 13절입니다. 과거에 이 구절에서 깊게 인상받은 것은 생수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이신 것과 이 생수의 근원을 어떤 이유로든 버린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는 ‘악한 것’(evil)이라는 점입니다. 아침에 이 부분을 다시 묵상할 때 깊은 속에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오 주 예수님, 얼마나 많은 때 ‘다른 물’을 먼저 마심으로
‘참된 생수’이신 당신께 나아가는 일에 게을리 하였던지요!
주님 용서하소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깊은 속은 여전히 목마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수의 근원된 당신을 얻도록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에도 장애가 느껴질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말씀을 대하더라도 단지 영적 지식을 얻는데 머물고,
그 안에서 당신을 생수로 만날 수 없었을 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오 주님, 마음을 분산시키는 안과 밖의 여러 우상들을 처리받기 원합니다!
비둘기의 눈처럼 단일하게 당신만을 바라 보게 하소서!
당신만을 생수로 마시기 원합니다.
오 우리의 온 존재를 정결케 하옵소서! 단일하게 하옵소서!
다른 일로 마음이 분산되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오 주님! 순간순간 돌이켜 당신을 생수로 마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생수로 적셔지게 하소서!
가시와 엉겅퀴를 제하시고, 먹기에 좋은 채소를 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