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35회 -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에세이
청지기 , 2023-05-19 , 조회수 (609) , 추천 (0) , 스크랩 (0)


  요즘은 튀어야 주목받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는 기회가 오면 최대한 자기를 과시하여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사람이 성공할 기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나온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내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원리가 충돌할 때 말씀대로만 살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실패의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된 한 가지는 상황따라 어중간하게 처신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것이 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식의 ‘다름’때문에 겪는 불이익은 감수할 각오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 하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스케줄따라 말씀을 읽어가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 앞에 머물러서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he who humble himself)은 높아질 것입니다(눅18:14하).

 

 

  위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두 사람(바리새인과 세리)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내용을 대비하여 소개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은 자신이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들과 다르고, 특히 이 세리와 다르다’고 한 후, 그 증거로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God, be propitiated to me, the sinner)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본문을 대할 때, ‘오 주님, 여기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요? 또한 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누가 그런 예에 해당되는지요?’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어서 ‘주님 저는 당신 앞에 어떤 자입니까? 눈이 열려 자신의 참 실상을 보게 하소서!’라는 기도도 이어졌습니다. 특히 실제 삶 속에서 이 말씀을 준행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는 것’(타페이노오, 5013)이란 동일 단어가 들어 간 몇 구절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져 여러분에게 전한 것이(고후11:7).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빌4:12).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약4:10).

하나님의 권능의 손아래서 겸손해 지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8).

 

 

  위 말씀들과 관련 해석들을 참고함으로써 여기서 ‘낮춘다’는 말의 의미는 “초라한 환경에서 보잘 것 없게 되는 것”입니다(빌4:12, 각주1). 혹은 ‘겸손하여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기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눅 LS #41)입니다. 과연 자원하여 ‘보잘 것 없는 존재’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런지! 사실 이런 태도는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며 우리 천연적인 사람은 결코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천연적인 옛사람 안에서 위 서두의 세상의 원리가 어느 정도는 교회 안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기에 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속에서부터 ‘오 주님, 저로 그러한 사람으로 발견되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한편 ‘자신을 낮추는 것’에 대한 위 정의에 비춰볼 때, ‘자신을 높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저절로 얻어졌습니다. 즉 우리는 자기를 높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냥 우리 옛 존재 자체가 ‘자기를 높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겉으로 겸손한 척 하는 경우도 본질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라’는 위 말씀을 실행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를 낮추신 그 생명’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은 위 빌립보서 2장이 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곱 단계로 낮추신 기록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낮아짐을 가져 온 비결은 5절의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에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즉 낮아짐이라는 밖의 ‘행동’은 그 이전에 우리의 ‘생각’ 안에서 먼저 낮아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언급한 ‘주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의 내용이 그 뒤인 2장 7-8절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3-4절이라는 점입니다. 즉 주 예수님은 일곱 단계로 낮아지실 때, 삼일성가운데 “오직 생각을 낮추어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3절)과 “자기 장점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장점도 귀하게 여김(4절)을 먼저 실행하신 것입니다.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의결대로 미리 아신 바에 따라 넘겨지신 이 분”(행2:23)이라고 말씀함으로써, 제 2격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 것이  “창세 전에  신성한 삼일성에 의해 열린 회의(벧전1:20, 계13:8)”(각주1) 결과 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위 각주(빌2:5절)는 이어서 우리가 주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원하여 자기를 낮추는 생각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빌1:8)”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내적 느낌과 생각에서 하나 되는 정도까지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연로하신 프란시스 볼 형제님이 젊은 훈련생들 속에 섞여서 FTTA훈련 장소 카펫 청소를 하시던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나이를 따지고, 선 후배를 따지는 수직적 문화에 오래 젖어 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어떤 대만 동역자 형제님은 나이 어린 사람부터 노년까지 누구와도 어울려 대화할 수 있고 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너무 부러웠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심지어 교회 생활 안에서도 어느 정도 ‘코드’가 맞으면 대하기가 편하고, 그렇지않으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처리되지 못한 기질과 직면해야 했습니다. 오,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 또 누구와도 어울리시고 목양하시는 주 예수님의 그 인격을 살아낼 수 있을지 … 깊은 탄식과 함께 그분을 살아내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오 주 예수님, 남은 날동안 기꺼이 자원하여 자신을 낮추사

스스로 죽음까지 도달하신 당신의 그 인격을
저도 살아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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