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33회 -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에세이
청지기 , 2023-05-05 , 조회수 (680) , 추천 (0) , 스크랩 (0)


오래 전에 학교 다닐 때 새학기가 되면 가정 형편을 조사하는 용지를 받았습니다. 채워 넣어야 할 많은 빈칸들 중에 하나였던 아버지 직업란에 저는 어김없이 ‘농업’이라고 써 넣곤 했습니다. 부친은 평생을 남의 땅을 부쳐먹는 소작농으로 사셨습니다. 오래 전에 작고하셨지만, 지금도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이고 햇빛에 검게 그을린 부친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이처럼 농사꾼의 자식인 저는 누가 직업이 ‘농부’라고 하면 왠지 친근하고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요한복음 15장을 읽을 때, 주님께서 하신 첫 마디인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1절)라는 말씀은 조금은 낯설고 금방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의 아버지는 농부”라는 주님의 고백에 대해 평소와 달리 깊이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 주님, 성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접근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이런 친근한 표현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조금 찾아본 바에 따르면, ‘농부’(husbandman)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오르고스’(1092)인데, ‘농부’ 혹은 ‘포도(가지)를 손질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참고로 이 단어는 “농부는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린다”(약5:7), “수고하는 농부가 수확물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후2:6),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눅20:9, 마21:33, 막12:1-2)라는 문맥에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농부이시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농부의 의미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는 우주적인 포도 농장에는 과연 몇 그루의 포도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일까요? 그냥 가정 집에 정원수처럼 키우는 포도나무가 아닌 이상, 통상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져야 그래도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광대한 포도원에 달랑 한 그루의 참 포도나무만을 경작하시고 계십니다. 즉 전후 문맥을 볼 때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고백하신 주 예수님 이외에, 다른 포도나무들이 그분의 농장에 더 있다는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물론 비유이지만, 제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즉 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그분의 아들 한 분에만 집중되어 있으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그루의 참 포도나무이신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신 분이시며, 우주가운데 유일한 실재 이십니다. 이 참 포도나무는 특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거듭난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이 그 나무의 가지들이 되어 이 하나의 참 포도나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고전6:17).

 

이 참 포도나무이신 아들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에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로 묘사되었고 (창28:12), 사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자(사람의 아들)로 계시되었습니다 (요1:51). 서신서에서 그분은 하나님과 거듭난 사람들의 단체적인 연합인 한 새사람이십니다(엡 4:24, 골3:10).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이 한 그루의 참 포도나무가 번성하고 열매 맺도록 돕는 도우미이거나 혹은 주인공인 참 포도나무를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하는 무대 배경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큰 그림은 사실 예전에도 어느 정도 인식이 있었지만 이 아침에 새로운 누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깊고 무거운 부담을 갖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이 과실 즉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2절).

 

 

교회 생활을 해 오면서 오랫동안 제 안에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 열매(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한 때는 그래도 난 주님을 누리고 어느 정도는 성령의 열매(갈5:22)를 맺고 있지 않는가 라고 스스로 위로를 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나가서 사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요15:16). 물론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된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롬1:15,7)을 볼 때, 여기의 과실을 맺는 것이 단지 사람을 도와 거듭나게 하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죄사함과 생명과 생명의 자람과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다 포함합니다(롬16:25). 어찌하든 여기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흘러 들어간 결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진리 추구를 많이 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더라도 나로 인하여 생명이 흘러나가서 나타난 구체적인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올해 초에 이 문제가 너무 무겁게 짓눌러서 주님 앞에 나아가 ‘오 주님 저도 포도나무의 가지가 아닙니까? 저도 열매를 맺는 가지게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몸의 지체가 되어 머리와의 신성한 교통 안에 머물게 하고, 또 다른 지체들과도 잘 건축되게 도우려면 많은 수고와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긍휼로 그동안 수년 동안 습관적으로 해 오던 열매는 없는 성경 공부는 끝내고…더 간절히 주님 앞에 매달릴 때, 어떤 형제님을 통해 연결된 두 명을 그분과 함께 정기적으로 목양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 덕분에 한 형제는 교회생활에도 참여했지만 여전히 상호 목양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러한 작은 체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남아 있는 과실을 맺는 것은 특정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몸 안의 동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의 가지들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여 당신의 농사를 망치게 했던지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래와 같은 찬송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이자 간증이 되게 하소서!

 

 

찬송가 662

영광스런 복음 전파 생명의 넘쳐 흐름/

우리의 산 간증으로 죄인들 구원받네(1).

 

… 나는 포도나무 가지 주님 안에 거하여/

생명 흘러 사람에게 주를 분배하겠네(3)

 

(후렴) 주여 내게 생명 흘러 주 표현케 하소서/

          당신의 산 그릇되어 생명 전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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