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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2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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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은사와 신학(1)
각 교단신학은 성경 해석을 일목요연한 체계의 논리로 요약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내용을 좀더 압축하면 신학의 전문성을
요하게 되고 여기서 좀더 압축하면 신학자 수준은 요하게 된다.
그 이상 압축하면 고도의 신학 전문지식과 주석가 수준 정도를 요할 것이다.
그 이상의 압축은 더 이상 압축 불가의 입장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단신학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압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압축의 한계란 설명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줄인 것으로
더 이상 줄이면 설명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음 앞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압축이 가능한 것이다.
그 압축의 답은 기록된 성경의 액면 그대로의 제출이다.
이 제출이야말로 완벽한 해석임과 동시에 여타한 군살이 붙지 아니한
최고의 해석으로서 이 해석에는 더 이상 더할 수도
그렇다고 뺄 수도 없는 완전표준 해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성경은 그 이해의 측면에서
높은 지식과 학문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학문이 없는 베드로와 같은 어부일지라도
그 심령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성경인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 같이 순전한 거듭난 영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 영에게 주어진 글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이르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요6:63)
동시에 주님이 이르신 이 말은 주님의 자의적인 말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시는 성부께서 친히 명령하신 그 명령을 액면 그대로 전달한 것이
주님의 말인 것이다.(요12:49)
따라서 주의 이른 모든 말씀에 근본은 영인 것이며,
그 영의 표현 체가 말씀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하신 성부는 高明 그 자체이시므로 더 없는 밝음이 그에게 있으므로
성부는 무한한 빛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요1:1-4)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바로 이 빛이 거듭난 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역시 高明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高明한 자가 되어 高明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며
항상 이런 高明한 위치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사32:8)
즉 신령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일로 끝맺음을 한다는 것이다.
이 신령의 최종적인 일은 부활체로 그 모든 일이 끝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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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은사와 신학(2)
신학의 결국은 모든 성경을 무리 없이 접하고 바로 깨닫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학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학문은 항상 학문의 한계성 안에 카테고리가 형성되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논하는 일에 부분적일지라도 신학의 카테고리로 대하는 것을
주의해야할 일이다.
성경은 성경 자체로서의 완전한 신학이기 때문에 교단신학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이를 성경신학 또는 성서신학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신학의 교재는 달리 있을 수도 없이 성경 자체가 교재이므로
이 원칙의 준수를 떠나서는 성경신학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은사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말씀의 은사는 방언과 통변과 신유에 은사처럼 느닷없이
거저 주어지듯 임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말씀의 은사 적 성격은 타 은사와 같이 임한다.
즉 문자의 말씀의 뜻에 합당한 그 이면에 있는 신령한 빛을
느끼고 체험하는 영적 현상은 타 은사의 성격과 같이 주어진다.
말씀의 은사는 이를 토대로 하여 꾸준한 성경의 정독과 함께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로 성경을 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말씀의 은사는 지속적인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개발되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에 신구약 성경 한 권의 중심으로 말씀연구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때가 이르면 성경 안에서 성경과 성경으로 이어지는 말씀의 해석이
바늘에 실 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 지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수준에 이르면 그 어떤 말씀을 증거 할지라도
성경과 성경이 전혀 무리 없이 스스로 이어져서 온전한 이해로
인도하는 신령하고 참된 교수법의 능력이 갈수록 탁월해 짐과 동시에
영 안에 말씀의 빛이 축적이 되어 그 빛의 룩스(Lux)가 상승되어 진다.
이에 상대적으로 말씀과 말씀에 충돌을 일으키는 왜곡을
꿰뚫는 눈이 크게 밝아지게 된다.
동시에 성경 한 권 외 다른 어떤 신앙서적과 신학적 가치가 높은 책일지라도
갈수록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는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의 때에 생각을 버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혀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도 진리의 옥이 발견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성경은 그 자체가 전체로 진리의 옥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리의 옥이 비교되어 지는 견지에서 이르는 말인 것이다.
(*주의 : 성경 외, 성경 사전과 원어 사전 등 성경의 지리와 배경과 역사적인 참고
서적 등은 기본 지식을 바르게 알기 위하여 늘 참조하는 것은 기본 원칙
임을 전제로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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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은사와 신학(3)
성경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언어 분석에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특히 단어하나 숙어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단어하나 숙어하나에도 많은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일지라도 재삼 들어다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때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단어의 뜻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음을
발견되어 지기 때문이다.
한 단어 한 숙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인식함의 중요함은
한 문장 전체를 반듯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 분석은 성경해석의 올바른 기본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분석의 습관화는 지나치게 문자 밖으로 나가는 영해와 자기적
상상에 대한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선을 긋는 규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게 된다
이러함의 많은 축적과 오랜 성경연구는 방대하다고 생각한 성경이
점점 압축되어지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는 다른 눈의 발전에
의하여 성경전체를 성령 안에서 한 눈에 받아 보는 통달의 능력이 발생한다.(고전2:11)
이는 말씀의 은사 적 성격인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엡1:17) 받아 그에서부터
성경신학연구에 출발하여 결론에 이른 것이기도 하다.
이에 덧 붙여 항상 기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진정한 말씀과 기도가 성립되어 진다.
곧 말씀의 이해를 따라 기도의 내용이 따라가므로 이해된 말씀이
액면 그대로 능력으로 전환되어지는 증거가 따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쉽게 말하면 성령 충만, 성령의 능력으로 표현된다.
(*후기*)
특히 지도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분량이 방대하다는 선입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자기적 실수인 것이다.
세상에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위한 열독의 분량이 성경 만한 분량이
되는 책을 20권이나 통독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비하면
결코 성경의 분량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그것도 평생을 두고 보는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성경의 분량이 많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성경의 통달에 대한 시작에서부터 자기적 반기가 되고
이에 빠져들면 늘 이러한 자기 암시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역사적 교단신학은 성경신학에 비할 바가 못됨을 알아 교단신학에
그치지 말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다시 성경신학으로 시작하여 그 끝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