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 중에 “흙수저, 금수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집안 배경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묘사한 일종의 자조 섞인 말입니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지고,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할 기회가 녹록지 않다 보니 이처럼 ‘출발선’ 자체가 불공평한 것이 더 실감 나게 본인들의 피부에 와 닿나 봅니다.
저의 젊은 날이 되돌아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흙수저’였습니다. 한때는 집 안의 경제 사정도 그렇고 주변의 가까운 지인 중에 내로라할 만한 사람도 없는 흙수저의 약점이나 열등감을 ‘고상한’ 정신세계를 추구하여 만회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방면의 독서를 많이 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 등입니다. 비록 돈도 배경도 없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도 빠지지 않겠다는 일종의 오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내면에서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신약 빌레몬서를 알고 난 후부터입니다. 즉 빌레몬서의 등장인물들(바울, 디모데,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오네시모)이 출신 신분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한 새사람’(one new man)으로서 공존하고 서로 사랑한 것을 눈이 열려 본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진도를 따라 아래 성경을 읽으면서 이 주제에 대해 새롭게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주님께서 소위 흙수저들을 택하셔서 금수저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과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는 그것이 금수저이듯 흙수저이든 다 거기서 거기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foolish) 것들을 선택하신 것은 지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고,
세상의 약한(weak) 것들을 선택하신 것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출신이 천한(lowborn) 것들과 멸시받는(despised) 것들과
없는 것들 (which are not)을 선택하신 것은 있는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시어,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1:27-29).”
위 말씀에 따르면, 소위 금수저들도 결국엔 부끄럽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렇지 않은 자신에 대해 너무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기억할 것은 소위 흙수저들이 장차 금수저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그런 길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바른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목표로 삼고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인지는 그다음 말씀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30-32절).
위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흙수저인가 금수저인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가 현재 그리스도 예수님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실은 아침에 좀 더 시간을 드려 묵상한 부분은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 우리에게 지혜가 … 되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고전1:24). 오 주님, 당신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니요,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본문 그대로 읽는다면,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영화롭게 됨)이 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좀 더 묵상할 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엡1:9),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안에 분배하셔서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는 한 단체적인 사람을 얻으시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땅의 선민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보내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위임을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분 자신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요 죄인인 우리(롬5:8-10)를 회개하게 하여 그분을 생명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 안에까지 거처를 정하시도록(엡3:17) 우리 영 안에 이미 계신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마음 안에까지)” “지혜’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 아닌 것에게 한눈팔고 있거나 어떤 이유로든 마음이 굳어지고 냉랭해진 상태에 있을 때, 그분은 각종 지혜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열고, 그분을 더욱 받아들이게 하십니다(엡3:10). 어떤 때는 ‘바람, 구름, 불, 호박금’으로(겔1:4), 또 어떤 때는 ‘북풍과 남풍’으로(아4:16), 때로는 영적인 아비와 같은 분량 있는 지체들의 사랑 어린 ‘권면의 방식’으로(고후4:11-13) 그분이 하나님의 지혜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그 외에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주님은 우리가 맏아들이신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룰 때까지 우리가 처한 ‘모든 사람, 모든 일, 모든 사물’을 사용하여 역사하십니다(롬 8:28).
아침에 이 부분을 묵상할 때 뜬금없이 얼음을 깨고 전진하는 배인 ‘쇄빙선’(Icebreaker)이 떠올랐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북극 인근처럼 바다가 두껍게 언 곳에서는 배가 전진하는 길은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쇄빙선을 만들어 이러한 난관을 극복했습니다(쇄빙선은 선체 바닥의 물탱크 속의 물을 뒤의 탱크 쪽으로 보내면 선체 앞쪽이 가벼워져 얼음 위로 올라타게 되고, 그 후 다시 물을 앞쪽 탱크에 보내면 앞이 무거워져 얼음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원리랍니다).
사람의 지혜가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거처를 확대하실 더 많은 길이 있으십니다. 그분이 이러한 ‘얼음’을 깨고 우리 마음 안에 더 깊이 들어오실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분을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자원하여 우리의 존재를 연다면 그분의 마음의 갈망은 더 빨리 우리 안에서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묵상할 때 제 마음 안에서 ‘감취었던 비밀 나타났으니 실재이신 그리스돌세. … 내 각 부분 주의 형상되도록 항상 깨어 주를 누리리.'(764)라는 찬송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오 주님,
우리는 모두 당신 앞에 ‘흙 그릇’으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요1:42, 롬9:23-24).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돌 그릇’(벧전 2:5)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금의 본성으로 적셔지고 변화된 단체적인 ‘금 그릇’(계1:12)으로
만들어 가고 계심으로 인하여 당신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