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4월부터 미국 정부로부터 ‘메디케어’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료 서비스를 거의 무료로 받게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입니다. 현재 콜레스테롤 약을 먹는 것 외에 건강에 큰 문제는 없지만, 기억력이 전보다 많이 감퇴된 것을 느낍니다. 가끔 잘 알던 사람의 이름이 생각 안 날 때는 당황스럽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이 나이를 먹어가는 표시일 것입니다. 한때 인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20대 후반쯤에 그 답을 얻은 이후로, 비록 머리는 희어지고, 기억력도 감퇴되고 있지만, 저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음은 삶의 큰 보람입니다. 한편 아침에 누린 아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예정된 결말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 자신께 이르도록)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엡 1:4-5).
에베소서는 교회를 강조합니다. 특히 위 본문이 포함된 1장은 성부의 선택과 예정, 성자의 구속, 성령의 인침과 보증을 다룬 후에, 끝에서 “그리스도의 몸”이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위 본문이 그 유명한 예정론의 근간이 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지난 며칠 동안 예정론의 핵심 내용과 그동안의 논의 과정을 설명하는 관련 소논문들 등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어떤 이는 구원받도록 선택되고, 또 어떤 이는 유기, 즉 버려지기로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1) 운명론이다. 2) 자유의지와 모순된다. 3)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 4) 보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과 모순된다 등의 반론이 있습니다. 또한 이번 추구를 통해, 예정론에 대한 칼 바르트의 재해석은 기존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 장로교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낸 분이, <목회와 신학>(1995)에 발표한 소논문에서 소위 ‘유기 교리’의 근거인 로마서 9장을 재해석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즉 로마서 9장은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임을 설명하는 문맥이지 선택 못 받은 사람들은 ‘유기’한다는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들을 다 읽어본 후에, 솔직히 제 안에는 신학자들이 위 본문에서 밑줄 친 ”Predestinating us unto sonship”에 대해 더 깊이 살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즉 예정에 대한 논의는 현재처럼 누가 구원받고 누가 버려지는가 보다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sonship’(아들의 자격)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래 내용은 이런 관점으로 추구하고 묵상한 결과입니다.
아들의 자격: 대부분의 한글 성경들은 이 ‘휘오데시아’(5206)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영어 성경과 일부 한글 번역은 이것을 ‘adoption’, ‘입양’ 혹은 ‘양자’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났다’(히 2:11)는 말씀에 따르면, 양자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기에, 회복역은 Literal Emphasis Translation과 NIV처럼 sonship(아들의 자격)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예정 되었음을 말하는 구절과 휘오데시아가 언급된 다른 구절들을 고려해 볼 때, 예정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롬 8: 29, 23, 갈 4:5, 19). “아들의 자격, 곧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한 로마서 8장 23절 회복역 관련 각주도 이 아들의 자격은 “우리 영이 거듭날 때 시작되었고, 우리 혼의 변화와 함께 계속되며, 우리 몸의 구속으로 완결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각주 3).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됨: 위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의 자격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4절), 즉 거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혼까지 거처를 확대하시고, 마침내 우리의 죽을 몸을 그분의 영광의 몸처럼 변형시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30, 엡 3:17, 빌 3:21).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삶을 날마다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풀과 같고”, 그것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데,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합니다(벧전 1:24). 항간에는 군대에서 사병의 꽃은 병장이 되는 것이고, 회사원의 꽃은 임원이 되는 것이고, 학자의 꽃은 노벨상을 받는 것이고, 운동선수의 꽃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꽃들’은 얼마간 달려 있다가 결국 모두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한편 주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예정된 꽃은 ‘휘오데시아’입니다. 그런데 이 꽃은 주님의 몸과 새 예루살렘으로서 영원히 영광의 하나님을 단체적으로 표현할 것입니다(계 21:11 상). 저는 20대 후반부터 여기에 제 인생을 걸었습니다.
오 주님, 우리가 당신의 맏아들의 형상과 똑같은 형상을 갖도록
창세 전에 미리 정해주신 것을 감사하고 찬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