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염려와 스트레스는 오히려 사람이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뭔가를 성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염려 혹은 스트레스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염려’를 다룹니다. 즉 성경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In nothing be anxious)(빌4:6)고 말씀합니다. 바로 앞 절은 또 ‘항상 기뻐하라’ 고 말씀합니다. 이 두 문장의 동사는 모두 헬라어 원문에서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살면서 가끔은 어떤 일로 염려를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그러한 염려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염려할 때 보통은 기쁨도 그 즉시 사라짐으로 이 또한 ‘항상 기뻐라’는 명령을 어긴 죄가 되어 ‘염려’는 이중 삼중으로 죄를 짓는 일입니다.
즉 믿는 이가 거짓말 하고, 뭔가를 훔치고, 교통 법규를 의도적으로 어길 때 우리의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가 염려할 때 그것 역시 양심에서 동일한 죄책감을 느끼고 즉시 주님께 돌이켜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진작부터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누가 복음 12장 특히 22절을 깊이 묵상하기 전까지는 ‘염려’가 회개해야 할 죄악이라는 느낌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여러분의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위 말씀을 기도하고 묵상할 때 처음에는 ‘주님 저는 다행히 끼니 걱정을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저녁에 누구를 편하게 만나야 할 때 양복 외에 마땅한 평상복이 없어 ‘뭘 입고 나가지?’ 하고 옷장을 뒤적거리긴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을 드려 이 주제를 묵상할 때 그런 차원보다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자체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관련하여 ‘염려’와 관련된 이런 저런 말씀들이 떠오르면서 이 주제의 좀 더 깊은 부분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첫째는 믿는 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도 못 믿겠다는 ‘불신’이 바닥에 깔려 있는 행위입니다. 위 문맥에서 주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수중에 있는 돈(재물)을 더 믿는 우리의 깊은 부분의 불신을 빛가운데 들춰 내십니다. 그분은 수 많은 “까마귀들”과 “백합화”가 염려없이 살아 가도록 은밀히 돌보시는 분이지만 그보다 더 존귀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는 내팽개치실 분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염려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의 실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충분히 섭섭해 하시고 화나게 하실 일입니다(민14:11).
둘째는 믿는 이가 무엇을 염려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까마귀’와 ‘ 백합화’의 사례 외에도 매우 흥미롭게도 “누가 염려로 자기 키를 한 규빗(약 45센티 미터) 더해지게 할 수 있느냐?’ 고 반문하십니다. 사실 염려가 별 도움이 못 된다는 점은 심지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즉 염려하는 일의 거의 90퍼센트 이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어찌 할 수 없는 경우랍니다.
셋째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씨가 뿌려진 사람처럼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는 말씀이 숨막히게 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주된 이유입니다(마13:22). 우리 모두는 거듭난 이후 영적 생명이 속히 자라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실제로는 주변에서 생명이 성숙한 사람들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세상의 염려’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에 대한 묵상은 물질과 관련하여 믿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세계와 불신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그것은 전혀 상반된 두 세계라는 내적인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영적으로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면에서 주변의 지체들이 물질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때 자기만 넉넉한 생활을 유지 하는 것은 주님의 몸 안에서 평균케 하시는 원칙(고후8:13-15)과 관련하여 양심이 편치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본질적인 정체성을 외면할 때, 그들은 사탄이 넣어 준 염려에 휘둘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적으로 약 20여 년 전에 다니던 세상 직장을 내려 놓고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어떤 전환기를 통과하거나 이런 저런 일 혹은 염려가 생각을 내리 누를 때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 때는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라는 말씀의 권면을 따라 주님께 맡기거나 혹은 필요를 구하여 응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뭔가 내리 누르는 것이 있을 때는 처음에는 고민하고 그것에 몰두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일단 그 문제를 하루 혹은 며칠동안 내려 놓고 잊어버림으로 해결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모든 교회들을 위한 염려’(고후11:28)를 했으니, 교회의 상태에 대한 염려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관해 오래 기도하고 또 염려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주님은 이런 저런 환경을 통해 심지어 교회에 대한 염려조차도 다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환경 속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따라서 은근히 안달하며 붙잡았던 염려의 끈을 그냥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주어진 환경에 아멘하고 평강가운데 있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면서 염려하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초조해 할 때는 이뤄지지 않던 것들이 내려 놓으니까 하나씩 둘 씩 성취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염려와 관련하여 “ 다만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추구하라 ” 고 말씀하십니다(마6:33). 그럴 때 “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더 할 것입니다. ” 라고 약속하십니다.
오 주님 그렇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의 염려를 내려 놓습니다.
다만 당신의 다스림과 말씀하심을 받아드립니다.
오 주님, 저로 당신을 다만 누리고, 염려 없는 삶을 살며,
지체들과 함께 기뻐하고, 평강가운데 즐거워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임에도 여전히 염려에 빠지게 하도록
갖가지 애를 쓰고 있는 대적 사탄에게 모든 수치를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정상적인 믿는 이들의 삶은 염려가 없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