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씀은 익히 알았던 내용이지만 어느날 문득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사도행전 8장을 읽는데 "사도들 외에는…."이라는 말씀(1절)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생겨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는 베드로의 복음 전파로 하루에만도 "삼천 명의 사람들이 더해지는"(행2:41) 등 큰 부흥을 맞이 합니다. 하지만 곧 이어 유대인들의 박해가 교회에 가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소의 사울은 스데반이 돌로 쳐죽임 당하는 현장에 있었고, “집집마다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어 감옥에 넘겨줌”으로 “교회를 파괴”했습니다. 이것이 아래 말씀의 배경입니다.
"그날에(스데반이 죽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외에는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행8:1).
이 땅에 출현한 주님의 몸인 교회는 영적인 어둠과 사망으로 둘러싸인 ‘빛과 생명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래로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밖으로는 위 다소의 사울의 예처럼, 직접 적인 박해, 그리고 안으로는 교회 구성원들의 옛사람의 요소에서 나오는 온갖 육체의 열매들(갈5:19-21)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데 큰 위협 요소가 되어 왔습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한 무리가 복수의 장로들이 되어 그 공동체의 간증을 짊어지는 기둥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행14:23, 딛1:5).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지역 교회(local church)로서 주님의 사도들이 다 그곳에 있었고, 그 중에 어떤 이들은 베드로처럼 장로직을 겸하기도 했습니다(벧전1:1, 5:1). 사도 바울도 회심 후에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둥같이 여겨지는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갈2:9). 이들이 바로 위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교회 역사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임명된 인도직분 (기둥들)조차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처럼 ‘기둥’이 흔들릴 때, 그 교회 특히 어린 성도들은 큰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여정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왜 흔들리며 어떻게 해야 견고한 지체로 끝까지 서 있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여러 유형이 단상이 떠오릅니다.
먼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었던 야고보는 자신 안에 있던 ‘유대교의 잔재’(갈2:12, 행21:20-24, 갈2:19비교)로 인해, 그리고 또 다른 기둥이었던 베드로는 훗날 그의 ‘위선’(갈2:12)으로 인해 하나님의 집의 기둥으로서 흠결을 보였습니다(갈2:9). 신약성경 회복역 각주는 관련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2:11-14, 행21:18에 비춰볼 때)…교회 안의 인도 직분은 조직적인 것이나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것이며, 인도하는 이들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변동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교회를 인도하던 이가 내면에 숨겨졌던 야심이 드러나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신약의 사역과 다른 길을 가게 되거나 혹은 도덕적인 흠결이 드러날 때 그의 기둥으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끝나게 됩니다.
셋째, 일제 강점기의 신사 참배나, 1980년대에 중국 본토에서 있었던 공산 정부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교회 인도자들이 한꺼번에 투옥되었을 때 교회는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인도자들의 변절은 교회에게 큰 실망이 되었고, 반대로 박해 중에도 여전히 신앙을 지킨 경우는 오히려 교회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관련하여, 워치만 니 형제님은 이처럼 사람이 요동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감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이 손실을 두려워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무서워하며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환경의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 견고하지 못한 기본적인 원인이다.”(워치만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성격, 한국복음서원, 229쪽).
마지막 때인 지금을 묘사하는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지방 교회들에는 ‘임명된 장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일곱 별”이 “일곱 교회의 전달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계1;16, 20). 그러므로 자신이 비록 임명된 장로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그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빛이신 하나님과 하나될 때 누구든지 “교회 타락의 어두운 밤”에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될 수 있고, 또한 그가 곧 기둥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계시록 3장 12절을 믿음 생활의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이기는 이는 내가 나의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도록 하겠다. 그가 결코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하나님의 이름과 … 새 예루살렘의 이름…그 사람 위에 기록할 것이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과 달리, 위 말씀은 천년 왕국이 시작되는 시점(교회 시대 끝)에서 이미 새 예루살렘이 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기둥이 되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전과 깊이 건축된 실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막 건축에 쓰인 아카시아 나무처럼 기질이 처리된 견고한 인성(성격)이 요구됩니다. 또한 더 많은 금의 요소들(신성)이 그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더해져야 합니다.
기둥과 관련하여 이런 기준들을 묵상할 때, 자신의 현 상황은 너무나 표준에 미달된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긍휼을 앙망합니다. 매일 아침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기를 사모합니다. 또한 주변의 지체들과 실제적인 방면에서 동역하는 것을 배우기 원합니다.
오 주님, 당신만이 우리의 견고한 성이시요 요새이십니다.
다른 것은 다 흔들려도 당신의 구속과 부활 생명과 건축된 교회와
진동치 못할 왕국은 견고함을 믿습니다.
오 주님, 우리로 그 실재와 깊이 연합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어둠과 사망의 요소를 씻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되신 당신으로 적셔지게 하시고,
빛을 비추는 정금산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