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배 끝에 설교자가 두 손을 위로 든 채 축도하는 모습은 한국인 성도들에겐 익숙한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로 시작하는 이 축도 내용은 나라마다 다 같지 않습니다. 한 예로 한국과 달리, 유럽의 루터교나 개혁 교회들은 예배 끝에 소위 ‘아론의 축도’(민 6:24-26)를 합니다. 현 한국 교계의 실행은 예전에 미국 침례교회와 장로교회 일부의 실행을 미국 선교사들이 전해 준 것입니다. 한편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저자는 아래 본문이 축도용이 아니고 사실은 편지의 마지막 인사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이제는 모든 성도가 주체적으로 누리는 말씀으로 되돌리면 좋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고후 13:14).
몇 년 전에 북한 최고 대학 출신이 복음을 듣고 탈북하게 된 간증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졸업 후에 중국에 외화벌이 나왔다가 곧 돌아가야 할 때쯤, 한 선교사가 잠시 복을 빌어주겠다고 해서 경계심을 풀고 만났답니다. 잠깐 복 빎을 받는다고 무슨 큰 문제가 있겠나 싶어 만났다가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골수 공산당원조차도 복 받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위 본문을 읽고 묵상할 때, 이 구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축도 의식 용도 그 이상으로 매우 깊고 포괄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소위 삼위일체(삼일) 하나님, 그리고 은혜와 사랑과 교통이라는 용어를 바로 이해해야 이 말씀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 관련 해석들을 찾아 읽다가 아래 회복역 각주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요 1:17, 고전 15:10).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다(요일 4:8, 16).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이들은 분리된 셋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께서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동일한 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필립 샤프)인 것과 같다”(각주 1).
저의 과거 경험을 볼 때, 사실 이런 내용은 읽어도 금방 이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금 사족을 달자면, 은혜와 사랑과 교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사물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자신, 즉 신성한 인격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 본문처럼 은혜와 사랑과 교통이 우리와 계속 함께 하려면, (은혜와 사랑과 교통이신) 삼위 하나님 자신이 우리 존재 안으로 지속적으로 흘러 들어오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오신다’는 이런 표현도 신학적 설명 혹은 추가적인 성경 본문의 지원이 필요할 수 있고, 또 실제 체험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더 충족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이런 장벽을, 여호와께서 자신을 “생수의 원천”으로 소개하신 것(렘 2:13)과, “생명수의 샘들로 안내하실 것”,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심” 등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해소했습니다(계 7:17, 22:1). 그런데 더 결정적으로는 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양들(우리)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요 10:10 하)이라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런 조에의 생명은 생명수의 강물에 우리 존재를 적시는 것과 같은 개념인 ‘그 영의 교통’을 통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설교자의 정성 어린 축도를 받고 은은한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기분학상으로 뭔가 은혜를 많이 받아 새로운 한 주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위 본문이 말하는 “성령의 교통”은 이런 축도만으로 우리가 바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통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요일 1:7), 둘째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2:10). 따라서 위 본문 내용은 어둠 밖에, 즉 빛 안에 머무는 사람들만의 분깃인 셈입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때 제 깊은 속에, ‘너는 지금 어느 영역에 있느냐?’는 세미한 음성이 있습니다. 옳은 것, 논리적인 것, 성경적인 것,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을 붙들다가 정작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분 자신에서 떨어져 어둠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제 안에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로 빛 가운데 머물며,
형제 사랑을 실행하게 하소서.
그 영의 교통 안에서
당신을 은혜와 사랑으로 체험하고 누리게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