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아침밥을 먹고 나면 연장을 챙겨서 집을 떠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가올 홍수를 대비하여 ‘고페르 나무’로 된 거대한 방주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뒤덮을 홍수가 나서 숨 쉬는 모든 육체를 멸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방주 짓는 일을 시작한 지 1년, 2년 아니 근 100여년이 지나도록 그런 홍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노아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며,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노아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갈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그때의 세상이 물로 멸망하였다.”(벧후3:6). “또한 하나님은… 세상을 홍수로 잠기게 하실 때, 의를 전파한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들을 보호하셨습니다.”(벧후2:5). 또 다른 곳에서는 후자에 대하여,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은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지시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자기 집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준비함으로써, 세상을 유죄 판결하고 믿음에 따른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히11:7)라고 보충 정보를 제공합니다.
위 노아의 사례에서처럼, 세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흘러가고, 또 성취됩니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경외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만 알고 다가올 일을 대비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외견상으로는 온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갈수록 힘들게 변해갑니다. 이런 때 일수록 깨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비록 바쁘고 고단하지만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읽은 그 말씀을 붙들며, 묵상하고 소화함으로써, 말씀이 우리 존재 안에 녹아들어 삶으로 표현되는 길을 힘써 가는 것입니다.
요즘 아침마다 베드로 후서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부분은 3장입니다. 그 중에서 11-12절이 우리를 깨이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질 것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방식으로 생활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재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오기 때문에 하늘들은 불에 타서 풀어질 것이고, 원소들은 뜨거운 열에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노아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 세상이 아무 일 없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위와 같은 말씀을 굳게 믿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밖에 나가서 총총 걸음으로 뒤로 걷기 운동을 하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위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깨이고, 또 말씀을 통해 씻김이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다가올 그 날(주의 날, 하나님의 날)을 대비해서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거룩한 방식으로 생활하라.
2)경건하게 살아라.
3)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재촉하라.
오 주님, 거룩한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기도하고 앙망하며 이 주제를 묵상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앞에서도 “여러분을 부르신 거룩하신 분을 따라 여러분 자신도 모든 생활 방식에서 거룩하게 되십시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벧전 1:15). 문맥상 이러한 거룩한 생활 방식은 ‘헛된 생활 방식’과 대조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혹은 우리의 생활이 분별된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기질이나 문화나 민족성을 벗어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인격이 표현되는 사람이 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바라기는 내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을 따라서 사는 것이지만, 많은 때 그러하지 못합니다.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속된 것에 연루되었을 때의 주님의 징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데 유익하도록 징계하십니다.”(12:10)라는 말씀은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안에서 먼저 시작된 심판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주님이 안배하신 이런 저런 고난은 우리의 거룩한 생활을 돕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달게 받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불로 태워 정련하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내적인 생명의 법을 따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살되, 양심의 거리낌이나 영적 사망의 느낌이 오면 즉시 돌이키고, 보혈을 의지하고 자백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의 기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부터 환경의 안배가 있을 때 그것에 저항하고, 불평하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그 제한 아래 머무는 삶도 거룩한 생활 방식의 일부입니다.
이런 생활은 자연스럽게 그 다음 명령인 경건하게 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또 무엇인지… 예전에 추구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같은 생활이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을 견딤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경건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벧전1: 6절 각주 3).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반대하는 사람은 이처럼 ‘경건’ 한 단어만 빛 가운데 바로 알아도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를 묵상하면서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더 많은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 번째 항목인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재촉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체험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런 묵상과 추구를 통해서 ‘주님의 날’(벧후3:10)과 ‘하나님의 날’(12절)이 동의어이고, 하나님의 날은 특정한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파루시아”(임재 -마24:3과 각주 3)와 그때의 모든 심판으로 시작하여, 크고 흰 보좌에서 사람들과 귀신들에 대한 심판으로 끝마치게 될(계20:11-15과 각주들) 긴 기간임을 알게 된 것과, ‘주님의 재림을 앞당긴다.’는 말의 성경 근거가 바로 이 구절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세상은 갈수록 더 혼란스럽고 악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주님의 인격을 살고 표현할 수 있도록,
당신의 영광과 그 영으로 우릴 강화시켜 주옵소서!
오 주님, 당신의 경륜을 완성하는 그 날을 속히 앞당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