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서들의 끝맺는 말 중에서 제게 인상 깊게 다가온 두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의 다섯 개 장에서 매우 쉬운 문장 안에 생명과 관련된 심오한 내용들을 담아서 설명한 후에, 5장 마지막 절에서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자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 하십시오.” ‘신성한 생명과 생명의 교통’ 그리고 그와 현저히 대조되는 ‘우상’에 대한 언급으로의 끝맺음은 한동안 제게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상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대치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라고 회복역 각주는 말합니다. 이러한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을 대치시키는 모든 것’은 사도 요한만의 관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자신’과 ‘그 외의 모든 것’(배설물)을 대비시켰습니다(빌3:8). 또한 여호와께서도 ‘생수의 근원되신 자신’과 ‘터진 웅덩이’를 대비시키셨습니다(렘2:13). 이러한 사례들은 과연 성경이 말하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묵상할 때 도움을 줍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 서신입니다. 베드로는 과연 도합 여덟 개의 장으로 된, 자신의 서신들의 맨 마지막 구절을 무엇으로 마치고 있는가? 맨 마지막 구절인 베드로 후서 3장18절은 “여러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아침에 이 한 구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한글과 달리, 영어 성경에는 명령어 형태인 ‘자라가라!(grow)’라는 단어가 문장의 맨 앞에 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단어는 ‘in the grace and knowledge’입니다. 즉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가 바로 베드로가 자신이 쓴 서신의 맨 마지막에서 한 말입니다.
“자라십시오! 은혜 안에서, 그리고 지식 안에서…”
이 역시 말은 쉽지만, ‘자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위 명령을 체험하려면 몇 가지 전제되는 진리의 빛이 요구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엡4:18). 둘째는 그분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창세전부터 감추어져 왔던 비밀’(골1:26-27)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두 번째 단계를 빛 가운데 보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셋째는 이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신다(증가되신다)(골2:19)는 것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자라심’ 사상은 소위 정통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받기 어려워합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 만찬 집회와 신언 집회 사이에 약 3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생명의 체험』 책자를 교통해 온지가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런 생명 관련 교통과 지나간 30여년의 교회 생활을 돌아보면서, 제 안에 생명 안에서 성숙한 존재로 발견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생활 한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생명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시간들이 생명의 성장과 무관하게 흘러갔다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요즘은 이 생명의 체험과 성장의 문제가 제게 매우 큰 관심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새벽에 몇 분 지체들과 함께 한 두 구절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먹고 기도하는 시간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한편 위 본문 말씀의 요지는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즉 ‘(생명이) 자란다.’는 말의 의미는 ‘생명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은혜’를 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 증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체험상으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생명의 성장’ 개념 자체에서도 우리의 그릇된 선입견이 벗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리 형제님의 다음과 같은 언급들이 큰 도움을 줍니다.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이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외견상의) 경건의 표현이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열심 있는 봉사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객관적인) 지식의 증가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풍성한 은사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능력의 증가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장은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이고,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의 증가이고, 성령의 지위의 확장입니다. 생명의 성장은 사람의 성분이 감소됨이고,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이며, 혼 각 부분이 정복당하는 것입니다.”(생명의 인식, 284-295쪽).
솔직히 제가 생명의 성장 개념을 마음 안에서 확신하게 된 것은 골로새서 2장 19절 본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했을 때입니다. 즉 개역 성경이 이 말씀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라고 주격으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하나님의 자람(으로 자란다)’, 즉 소유격인 것을 확인한 후부터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How)하면 이 생명(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라시는가(증가되시는가)? 바로 이 점을 베드로 후서 3장 18절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 안에서 입니다. 관련하여 “은혜에 대한 참된 정의는 아들 안에 주신 하나님 자신, 은혜는 어떤 사물 아니요 내 분깃 되신 하나님 자신”(376)이란 찬송가 가사를 누렸습니다. 어떤 환경을 통과할 때 밖의 어떠함보다는 내 안에 계신 그분을 앙망하고 조용히 그분과의 교통 안에 머물 때,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와 새로운 힘으로 주님과 함께 환경을 통과하게 됩니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 가져갈 때, 거기서 오는 빛비춤과 생명의 적셔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내주하시는 그분 혹은 밖의 말씀 앞에 진지하게 나아갈 때 얻는 누림입니다.
둘째는 ‘지식 안에서 입니다.’ 특별히 여기서의 지식은 본문에 따르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입니다. 많은 경우 성경 본문 혹은 메시지 개요를 ‘이해’한 것을 생명의 성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환경이 닥쳤을 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 안에서 이해된 내용에 더하여 ‘빛이 비쳐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말씀의 실재가 얻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말씀과 대치되는 상황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니 형제님의 『이기는 생명』에 보면,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벧전1:22)라는 말씀과 자기를 괴롭히는 또 다른 전 시간 봉사자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기도로 씨름하는 한 자매님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말씀이 그녀 안에서 현실이 될 때, 그가 체험으로 얻은 지식은 산 ‘지식’이었습니다.
오 주 예수님,
참으로 생명이 성숙한 자로 발견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저로 늘 당신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당신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확대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