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22회 - 와서, 듣고, 행함
에세이
청지기 , 2023-02-17 , 조회수 (586) , 추천 (0) , 스크랩 (0)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만일 나아갈 길이 안 보이거나 쉽게 풀리지 않는 복잡한 일에 연루되었을 때 그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때 문제의 근원은 다른 사람 또는 처한 환경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끝난 그 실재 안에 들어가면, 밖의 환경은 저절로 풀리거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세속화되고, 신앙의 여정에서도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는 혼돈의 때에 우리에게 과연 어떤 길이 바른 길이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물론 이 사역의 도움으로 ‘새 예루살렘’이 되고 ‘하나님 사람들’ 이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장기적인 목표임은 보았지만, 그것을 이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관련하여 요즘 며칠째 한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믿음 생활에서 붙잡아야 할 ‘원칙’ 혹은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성경 속의 한국말은 평이한데, 그 평범한 단어들이 담은 영적인 의미를 이해한 후 체험으로 가져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 나에게 와서 내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여러분에게 보여 주겠습니다. ” (눅 6:47)

( Everyone who comes to Me and hear My words and does them … )

 

 

1차적으로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말씀을 증거 하신 문맥의 결론 쯤에 해당 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가서 ‘산상수훈’을 들었으니 이제 그 들은 말씀을 실행하라 는 의미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볼 때 이 문장의 주어는 ‘Everyone’ 즉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제자들만 아니라 오늘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하고 지켜 실행할 것인지를 묵상할 때 먼저 이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어의 의미를 놓고 기도하며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 나에게 와서 ” : 주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실 때는 그냥 육신의 눈에 보이는 그분께 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인 지금은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아야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분은 지금 (몸의 머리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롬8:34).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그 곳’에 갈수 있는지…. 다행히 그분은 또한 (몸의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더 정확히는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지금 거하고 계십니다(골1:27, 고전6:17, 엡2:22, 딤후4:22). 따라서 실행 적으로 우리가 그분께 간다는 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으로 돌이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히4:16).

 

이 또한 말은 쉬운데 실행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셨지만, 틈만 나면 산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려면 기도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요구될 수도 있고, 외부의 환경에 방해받지 않을 만한 적당한 장소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시간도 이른 아침 혹은 그에 준하는 때가 좋을 수 있습니다. 이미 그분께 나아가는 생활이 익숙한 분들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 채실 것입니다.

 

- “ 내 말을 듣고 ” : 여기에 큰 함정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소위 기도 제목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지만 그분의 말을 듣기 보다는 ‘우리의 말을 그분께 들려드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참되게 ‘주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는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워치만 니 형제님은 주님의 사역자가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에 관련하여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전집, 제3집, 제6권, 한국 복음서원) 1과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세 종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첫째는 그가 한 말이고, 둘째는 그가 하지 않은 말이고, 셋째는 그의 영 안에 있는 말이 그것입니다.

 

니 형제님은 이를 위해서 듣는 사람이 “마음이 어지럽지 않아야 하고, 영이 고요해야 하고, 한 장의 백지장같이 조금도 선입관이 없어야 하고, 조금도 주관적이지 않아야 하고, 편견이 없어야 하고, 안에 규정도 심판도 없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9쪽). 오, 사람이 같은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들으려면 우리가 어떠해야 할런지요!

 

주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이 행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하신 것이 없고” 전적으로 아버지께 “들으신 것”에 기초하셨습니다(요5:30). 그분은 이 면에서 좋은 본이십니다. 또한 구약의 히브리 종도 주인에게 듣고 그대로 행하기 위해 ‘문설주에 데리고가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은 것’을 봅니다(출21:6).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시40:6),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50:4-5), “귀가 있는 사람은 … 들어라”(계2:7)라는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듣는 것’을 강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주님, 이 듣는 문제에 있어서 제게 큰 부족함이 있습니다. 주여 저의 귀도 깨우쳐 주시고, 또 열어 주소서! 매일 매 순간 주님의 지시하심을 듣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 들은 말씀을 실행함 ” : 이 부분도 저를 포함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는 ‘들은 말씀’이 없는데 임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본인은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말(생각)을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오해(혹은 스스로 해석)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분명히 말씀을 들었지만, 그대로 실행하자니 대가가 너무 커서 주저하고 지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것이 앞의 두 경우보다는 낫습니다. 언젠가는 그분의 음성에 우리가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기대했던 답변과 전혀 다른 음성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의 인수 증가와 부흥을 구하려고 그분께 자주 나아갔지만, 들려오는 음성은 ‘아내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왜 그러냐?’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아닌 존재를 먼저 만지고 다루시려는 음성을 알아들은 후에, 비로소 멈춤과 자기 부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위 본문을 다시 묵상할 때 바로 위의 구절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46절)? " 

 

' 오, 그렇습니다. 주님, 다른 많은 것들보다도 우리가 당신의 노예요,

당신은 우리의 참 주인(주님)이심을 눈이 열려 보게 하옵소서!

오주님, 이것이 저의 현재의 필요입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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