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19회 - 목사님 이세요?
에세이
청지기 , 2023-01-30 , 조회수 (500) , 추천 (0) , 스크랩 (0)



가끔 경험하는 “목사님이세요?”라는 질문이 제겐 다소 곤혹스럽습니다. 이발소에 가거나, 식당에 갔을 때, 아니면 기독교에 계신 분들과 대화할 때 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는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만나면 어느새 ‘목사님’이 저의 호칭이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에겐 그 말이 그런 식으로 이해되었나 봅니다. 예전 같으면 본능적으로 밀어내듯이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과연 그것이 지혜로운 최선의 답변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지방교회에는 목사가 없다’, 혹은 ‘목사는 성경에 없다’는 말에서 오는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 그리고 목회하다가 교회 생활하게 된 분들이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들을 때, 이것이 언젠가는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제 안에 자리 잡아 왔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문제를 지난 며칠 동안 주님 앞에 가져가 보았습니다. 그 결과,  단지 호칭 문제만이 아니고 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우리는 얼마나 많은 때 피상적이고 극단에 치우치기를 잘하는지요! 주여 큰일 작은 일에서 ‘옛 나’(롬6:6)를 살고 표현하는 데서 구원받기 원합니다 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지난 교회 생활을 돌이켜 볼 때, 관련된 몇 가지 사례들이 생각납니다. 예전에 어떤 전시간 봉사자 형제님이 유사한 경험을 아내에게 털어놓자, “아니 당신이 밖에서 어떻게 처신을 하고 다니길래 그런 소리(목사)를 듣느냐”는 핀잔이 돌아왔습니다. ‘사모님’ 소리만 듣던 어떤 분은 교회 생활 초기에 지체들이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주님의 몸에 대한 이상을 보고 조기 은퇴까지 한 분이었는데, 집회 중 ‘목사는 성경에 없다’는 한 자매의 신언 내용에 마음이 상해서 교회 생활을 접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형제님은 오래 목회하셨지만, 교회 생활을 시작하신 후에는 자신을 낮추고 다만 한 형제로 여전히 남아 계십니다.

 

또 어떤 형제님은 자신이 목사였던 것을 회개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래전에 미국 동부 어떤 지역 교회 연합회가 낸 이단 관련 신문 광고 때문에 목사님들 몇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에 지방교회들 안에도 전시간 봉사자들이 있고 일부는 교회 지원을 받기도 한다는 말이 나오자, 한 분이 즉시 그 사실만이라도 소책자로 만들어 교계에 배포할 수 없느냐고 반응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목사제도와 관련된 긴장 관계가 생각보다 민감하고 깊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지난 며칠 동안 고려해 본 성경 본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한 분이시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23:7-8).

 

그러나 …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 이와 같이 너에게 또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라(계2:6, 15-16).

 

그분께서 직접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신언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이로, 또 어떤 사람들은 목자(목사) 및 교사로 주셨습니다(엡4: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2:11).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은 위 ‘니골라당의 행위’(계2:6)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를 달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두 단어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정복하다’ 혹은 ‘보다 우월하다’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일반적인 사람들’, ‘세속적인 사람들’ 혹은 ‘평신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정복하다’, ‘평신도보다 우월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니골라당’은 일반적인 믿는 이들보다 자신들이  높다고 여기는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각주 1).

 

 

사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실행하는 <성직자 평신도 제도>가 ‘다아비’(Darby)의 형제회를 통해 청산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진보였습니다.  또한 주의 회복이 두 분 형제님들을 통해 이런 형제회의 귀한 유산을 이어받은 것은 주님의 큰 긍휼입니다.  성경이 경고하는 ‘니골라당의 행위와 가르침’이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는 갈수록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볼 때 밖의 ‘호칭’이 청산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대접받아야 한다는 우월감마저 완전히 씻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인종들과 함께 살다 보니, 한국인의 기질과 문화(장유유서 등)가 <그리스도 자신>은 아님을 깨달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나이가 더 많다거나, 교회생활 연수가 더 많거나, 전시간 훈련을 받았거나, 현재 어떤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은근히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과연 그것은 위 <니골라당>의 행위와 전혀 무관할까? 세상에서는 위계질서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마땅히 서로 존경해야(특히 연장자에게) 합니다(벧전 5:5). 그러나 남이 나를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야 할 한 새사람 안에서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이물질’입니다(엡1:23, 골3:10-11).

 

이 주제를 주님 앞에 가져가 묵상할 때, 제 안에 떠올랐던 말씀과 찬송 그리고 정리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 사람 앞에서 무엇이 아름답고 존귀한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고후8:21). 

자신에 엄격해 공의 따르며다른 이에겐 은혜로 관대하게/ … 항상 왕국의 실재를 살아야 (751장).

 

첫째, ‘지방교회 안에는 목사가 없고, 그들은 평신도들의 모임이다’라는 항간에 떠도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지방교회들 안에는 ‘가르치고 목양하는 사람들’(엡4:11)인 목사가 많다.

 

둘째 현직 목사님들을 대할 때는 상대를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셋째전시간으로 가르치고 목양하는 형제들을 외부인들이 ‘목사’라고 부를 때 즉각 부인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그러한 밖의 호칭보다도 우리의 핏속에 녹아있는 ‘니골라당’의 맛을 걸러내어 사도 바울처럼 “여러분의 노예가 된 것을 전파합니다”(고후4:5)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기를 더 관심해야 한다.

 

 예수님비록 ‘만물의 찌꺼기’(고전4:13) 취급을 받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신성한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주님우리 핏속에 녹아 있는 니골라당의 맛을 온전히 제하소서!  대신에 교회 안에 있는 당신의 일꾼들 안에서 형제이자 노예로서의 향기는 날마다 증가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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