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가 저무는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마치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올해 초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루에 성경 10장(章)씩 읽는 것을 목표로 해서, 처음에는 영어로 1회 독을, 그 후에는 한국어로, 다시 영어로, 또 한국어로, 다시 영어로 읽던 중 오늘 역대하까지 왔습니다. 보통은 그날 읽기를 시작할 때, 처음 첫 구절은 여러 번 읽고 묵상하여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래 본문을 어느 정도 그리하다가 이젠 더 진도를 나가려는데 ‘in those days‘(그 무렵)라는 말씀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전후 문맥과 열왕기하와 이사야의 관련 본문을 더 살펴본 결과, 히스기야 왕이 병든 것이 이 ‘그 무렵’과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든 이후에 히스기야의 처신이 저에게도 큰 교훈과 경고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그에게 말씀하시며 표적을 주셨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해져 자신이 입은 은택에 보답하지 않았다(대하 32:24-25).
그 무렵: 히스기야는 25세에 즉위하여 29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위 기간에 적지 않은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면, 실로암 연못으로 이어지는 총길이 533미터의 지하수로는 그가 만든 것입니다. 중단되었던 성전 경배와 유월절을 전반적으로 재개한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의 직접적인 배경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공을 막아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즉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위협에 “성전 문들과 기둥들에 입힌 금까지 벗겨” 바치고, 침공에 대비해 방어성을 건축하고, 전투 지휘관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산헤립이 쳐들어와 악한 말로 여호와 하나님까지 모욕할 때, 그는 신언자 이사야와 함께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전쟁에서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하룻저녁에 적군 십팔만 오천 명을 죽게 하신 것 때문이지, 그가 직접 싸워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왕하 19:35).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여호와께 예물을 바치러 왔고,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값진 것들을 가져오고”, “히스기야는 모든 민족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습니다”(대하 32:23). 바로 이 무렵에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든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병이 다음에 보듯이 그의 마음이 교만해진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But): 히스기야가 위와 같이 모든 민족의 눈에 존귀하게 되어 마음이 교만해진 것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중병이 든 것이었지만, “그런데 그는 마음이 교만해져” 여호와의 이런 1차 경고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사한 사례를 웃시아왕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웃시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강성한 나라를 가지게 되었고, 화살과 돌을 날리는 장치를 고안하여, “그의 명성이 널리 퍼졌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가 “마음이 높아져 멸망을 자초”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대하 26:7, 15-16). 즉 그는 아론의 자손의 몫임에도, 함부로 분향단에서 향을 피우려다가 이마에 나병이 들어 평생 별궁에서 나병 환자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러나(But): 한글 번역과 달리, 영어 성경에는 위 본문에 이어진 26절을 ‘그러나’(But)로 시작합니다. 또 한 번의 반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즉 히스기야는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리”는 여호와의 2차 경고를 받고, “마음이 교만하였던 것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25하-26절). 이런 묵상과 추구를 통해 다음 몇 가지가 제 안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첫째, 주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시며 반드시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관련하여 몇 가지 사례들이 더 생각났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이 그랬고(단 4:30-31),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헤롯왕이 그랬습니다. 즉 그는 군중으로부터 신으로 추앙받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에” 즉시 주님의 천사가 그를 쳐서 “벌레에 먹혀” 숨을 거두었습니다(행 12:22-23).
둘째, 병이 들었을 때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먼저 왜 이런 환경이 내게 왔는지 주님께 여쭐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신유의 은사가 있었지만, 자신의 “육체의 가시”(안질?)나 디모데의 위장병을 무조건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고후 12:7, 딤전 5:23). 또한 한 신실한 성경교사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한 달가량 심문당한 후유증으로, 2년여를 폐결핵을 앓으면서 주님께서 생명나무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에 큰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셋째, 지금까지 사는 동안 제게도 몇 번의 ‘그 무렵’과 ‘그런데’와 ‘그러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남은 저의 삶이 ‘겸손한’ 지체로서 은혜를 받고,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위치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벧전 5:5-6). 아멘.
오 주님, 당신의 권능의 손이 우리를 누르실 때
겸손해 지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를 받는 자들로 발견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