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도] 추동훈님의 페러독스
성경진리토론방
, 2004-07-17 , 조회수 (453) , 추천 (0) , 스크랩 (0)


추동훈님이 하도 상호내재를 주창하기에 상호내재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아직 대답이 없습니다.

지방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고 물었는데도 밝히지를 못하고 울산에 있는 작은 지회를 섬긴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렇다면 작은지회에서 선생의 위치에 있는 분인가요?  선생의 위치에 있는 정도라면 상호내재 정도는 풀어내야 합니다. 다음

학생이 선생을 가르치는 것을 페러독스라고 합니다. 역설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말타기 입니다.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을 목사가 해 먹고 있다는데, 성경 어디에서 집사님에 해당되는 분이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양육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디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영어를 들이대면서 목자로 해석을 해야 한다. 혹은 목사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 한다면, 미국 본토에는 왜 목사가 있는가 말이지요. pastor, reverend, 등  목사의 직함도 여러가지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안수하여 세운 디모데 목사, 혹은 여러 지교회의 목사들 (계시록에서는 일곱 교회의 사자로 표시)이 안수하여 목사직을 계승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시험하여 보고 난 뒤의 이야기지요. 마치 맛디아를 뽑듯 말입니다.  구약 성경은 선지자, 왕, 제사장들이 자신의 위를 후임에게나 자식에게 계승하면서 안수를 제사장의 안수를 거치거나 선지자의 안수를 거치게 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자, 선지자, 제사장, 사도, 목사 라는 분명한 제도권에 들어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입고 세움을 입어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음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사도성을 계승했다 어쨌다 하는 케톨릭의 주장과는 별개로 목사로 하나님께 부름을 입었다는 확실한 내적 증거(하나님의 권위)와 외적 증거 (신학을 통하여 목사로 세움을 입는 교회의 권위)를 입고, 교회를 치리하며 말씀을 증거하는 일과 성찬식을 거행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을 하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무엇이 평신도의 역할을 빼앗았다는 겁니까?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평신도의 직제는 교회에 봉사를 하는 일을 하고 기도의 담력을 얻는 아름다운 직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고후 9:1, 엡 4:11-12, 딤전 3:8-13)

특히 디모데 전서 3장 5절에서는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이 못하면 어찌 하나님이 교회를 돌아 보리요) 라는 말씀을 통하여, 감독은 교회를 돌아 보는 직책으로 분류를 했고 집사는 봉사하는 직책으로 구분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하들은 평신도로서 교회를 돌아 보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 되겠는데, 된다고 보십니까?

성경에서 확고히 분류를 해 둔 말씀이 있는데 까짓 윗트니스 리의 주장을 합법화 시키고 윗트니스 리를 높여 주기 위하여 성경까지 버려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과연 그대들의 충성은 그리스도께 하는 충성이 아니요, 오직 윗트니스 리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대들이 인위적이다 혹은 인본적이다, 자유주의이다, 지방교도이다, 윗트니스 교도이다, 중국적기독교이다. 하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인줄 아십니까?

과연 그대들의 푯대가 무엇이며 어디까지입니까? 천국이며 예수 그리스도까지 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끝내는 겁니까?

만약에 이 땅에서 끝내는 일 같으면 그대들의 논리대로 살 일입니다. 비유컨데 마음을 다스리는 불교나 혹은 도교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네들도 이 땅에서 끝내는 일입니다. 천국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대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뉘신줄도 알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윗트니스 리라는 이단사설에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윗트니스 리에게 충성을 다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자들이라는 말이지요.

내 책망을 가벼이 듣지 마십시요. 그대들의 지금까지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을 하고 있으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와 성령론에 대하여 심각한 훼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도라고 할찌라도 잘 못한 부분에 대하여는 책망을 할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하여는 책망을 하고 있다는 말이며, 오순절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이상적인 목회자의 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히 말하건데 책망이라는 것은 피켓으로 책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서 판단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 속에서 책망한다는 것이지요. 설교나 책이나 글을 통해서 책망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역사에는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 한 것은 못했다 하는 마음의 판단은 판단이고 이를 글이나 말로 냈을 때에는 비판이 되는 겁니다. 비판을 하는 분들은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구요.

비판의 정도를 벗어나서 비난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열매는 고사하고 하나님 앞에 득죄하는 것이 됩니다. 네 말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신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대들의 주장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한 줄 짜리 비판의 글과 물고 늘어지기와 말타기 정통신학자들의 글에 무임승차하기 등의 행위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비난의 글에는 마땅히 욕이 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욕 먹을 짓을 했으니 마땅한 겁니다.

학자는 자신의 말과 글을 아끼며 명예를 겁니다. 흰소리는 안한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잘 못된 글을 썼다면 지체없이 사과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확고한 말과 주장에는 목숨까지도 거는 겁니다.

용어 사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남의 글을 출처없이 (허락을 받지 않고 개인의 책을 인용하는 부분) 사용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분노를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 학자의 양심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양심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대들의 그릇된 목사관에 대하여 지극히 실망합니다. 평신도들의 한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용감하게 풀어대는 윗트니스 리에게 충성을 다하다니... 윗트니스 리에게 상을 받으십시요.

아무래도 그대들과는 천국에서 못 만날듯 싶습니다. 윗트니스 리와 함께 저주를 받은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속히 나오셔야 할 것입니다. 윗트니스 리의  망령에서 벗어나시요. 감히 사도들의 성경에 도전하고 있는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따른다면 그대들의 여지껏의 공력은 모래성에 불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