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7-17 , 조회수
(314) , 추천
(0) , 스크랩
(0)
[윗트니스 리의 성령관 비판]
책을 저술하는 저자의 입장 표명이 가장 확실한 부분은 책표지에 등장하는 몇 소절의 글에 있다. 윗트니스 리의 [성령]의 표지에는 두 개의 주제가 표제어로 기록되어져 있다. 여기에서 윗트니스 리는 성령에 관한 자신의 무지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윗트니스 리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이다.
1. "성경이 그 책이듯 오늘날 하나님의 영은 그 영이다. 그 영은 만유를 포함한, 복합적인, 과정을 거친 영이다. (<= 성령이 무슨 과정을 거치셨는가?) 이 영은 하나님의 영이며, 여호와의 영이며, 성령이며, 아버지의 영이며, 실제의 영이며, 보혜사이며, 능력의 영이며, 예수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분의 영이며, 주의 영이며, 주 영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영원한 영이며, 은혜의 영이며, 영광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며, 일곱 영이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 중에서>
[비판] 성령이 무슨 과정을 거치셨는가? 윗트니스 리는 성령에 대하여 구분조차 못하고 있는 무식자이다. 성령이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대하여 아버지의 영으로 확실히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마치 소금을 정제하듯 설탕을 정제하듯, 과정을 말하는 윗트니스 리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제되는 과정을 통하여 성령이 되셨다는 주장을 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윗트니스 리의 글을 보면 이와 같은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윗트니스 리는 성령의 존재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 윗트니스 리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이원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윗트니스 리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밖에 보이지 아니하며 성령은 조사에 불과할 뿐이다.
윗트니스 리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그가 성령에 대하여 전혀 체험이 없고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온전히 무식자임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 안에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은 성령과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과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은 아들이신 아버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을 수 있다." (윗트니스 리, [성령], (서울:복음서원, 1989) p. 191)
윗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직 삼일론에 매달려 삼위의 하나님을 삼일로 묶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윗트니스 리는 다음의 말로 그의 모호한 삼일론에 대하여 기가 질리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요 14장 26절을 연구할 때) 아버지가 그 영을 보내셨을 때 아들인 그 영을 보내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ibid, p.191)
처처에 윗트니스 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의 무식한 변론으로 일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각으로( 유물사관과 불교권의 문화에 기인한) 성경을 이잡듯 뒤져서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양태론을 펼치고 있으며 아리안주의이며,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사고로 성령을 풀어대고 있다. 윗트니스 리의 사상에는 성령이 들어가 있지 않다. 다음의 증거는 윗트니스 리의 성령에 대한 체험 혹은 성령관의 현주소를 확고하게 밝히는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2. "성령 안의 침례는 비밀이다. 워치만 니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전도의 왕 스펄젼도 방언을 말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그의 저서를 많이 연구했다. 그러나 그가 방언 말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성령의 침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무디는 위대한 전파자였다. 그의 저서에서도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제시 펜 루이스를 안다. 그녀는 십자가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녀는 영국에 있었던, 방언을 말하는 것을 강조하는 소위 오순절 운동을 극구 반대했다. 엔드류 머레의 역시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도 그가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 방언을 말하지 않은 많은 영적인 거인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령 안의 침례를 받지 못했다고 너무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 안의 침례 중에서>
[비판] 윗트니스 리는 "성령 안의 침례는 비밀"이라는 말로 자신과 자신의 스승인 워치만 니를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윗트니스 리는 자신이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성령의 체험(세례)를 받으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무식한 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윗트니스 리는 쟁쟁한 설교가와 석학을 예로 들면서 의도적으로 성령의 체험에 대하여 무시하고 있다. 마치 성령의 세례를 받은 분들 가운데에서 방언을 하는 분이 있다면 무식한 자로 오인되도록 의도적으로 짓누르고 있다. 윗트니스 리의 말을 빌면 성령을 체험한 분들은 무식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윗트니스 리는 이렇듯 그의 말재간으로 성령의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근심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과연 위트니스 리가 앞에서 열거한 신앙의 선진들이 성령의 체험이 없어서 성령의 체험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그 분들은 오히려 자신의 체험한 것이 독자들에게 알려지면 교만해질까 두려워 했던 분들이다. 스펄젼은 그의 설교노트 "영혼의 상처"에서 J.C.Hare 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소개하면,
" 보혜사는 세상으로 확신케 하려 오셨다. 보혜사!
나의 형제여, 이런 사렴을 띠고 오신 분을 보혜사라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당신을 위로하느 대신 당신의 죄악을 확신케 함으로써 당신에게 수치와 혼란을 주고 말할 수 없는 고뇌와 낭패에 떨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결코 그렇지 않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죄를 깨닫게 해주신 성령이 단호히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그가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그가 보혜사 되심을 증거해 준다고 강력히 주장할 것이다. 만일 죄의 깨달음과 확신이 다른 방도로 이루어진다면 분명히 우리를 수치심에 짓눌리게 만들고 말할 수 없는 공포심에 삼키우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지므로 그 날개 위에 회유와 위로를 싣고 다가온다. 그가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죄가 무엇인가를 기억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이다ㅏ. 다른 모든 죄에 대한 확신은 소망이 없다. 여기에는 소망이 확신에 수반되고 또한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안히나 죄를 깊이 느끼고 실제적으로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다른 죄로 더불어 이 죄악을 옮겨버리심을 동시에 느끼게 될 것이다." 스펄전, [스펄젼의 설교노트] 데이빗 풀러편, 김형대역, (서울:생명의말씀사,1979,) p.359.
이는 확고히 말하건데 헤어와 스펄젼 두 분은 성령의 체험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성령을 체험하지도 못한 위인이 어찌 성령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윗트니스 리의 저서인 [성령]에는 성령이라는 이름만 나올 뿐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도배가 되어 있다. 윗트니스 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삼일론을 통하여 교묘하게 성령론을 배설하여 놓았으나, 어디에서도 성령론은 없다.
그리하여 윗트니스 리는 성령에 대하여 치졸한 방법과 조악한 말로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된 영으로 표현하고 있는 샤벨리안 주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리 가도 아리우스적인 양태론이요, 저리가도 샤벨리안적인 양태론이다. 쓰레기같은 윗트니스 리의 저서인 [성령]은 1989년도에 15000 이나 했다. 당시 부목의 월급이 40만원 일 때이다.
이런 정도의 말장난꾼이나, 말재간꾼은 교회 역사에 보면 널려있다.